폐지 가격 급락에 직격탄 맞는 노인들, 한가득 실어도...

입력 2022.11.10 06:04수정 2022.11.10 09:58
폐지 가격 급락에 직격탄 맞는 노인들, 한가득 실어도...
8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고물상에서 천정희씨(여·60대)가 폐지를 쌓은 리어카의 무게를 재고 있다. ⓒ News1 김성식 기자


폐지 가격 급락에 직격탄 맞는 노인들, 한가득 실어도...
8일 서울의 한 고물상에 폐지가 잔뜩 쌓여 있는 모습. ⓒ News1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김성식 기자 = "예전에는 리어카에 한가득 실으면 8000원은 받았는데 요새는 온종일 다녀도 3600원이야"

8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고물상 앞에서 만난 천정희씨는 "폐지 가격이 너무 떨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천씨가 전날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골목을 돌며 모은 폐지는 무려 약 70㎏. 천씨 키를 훌쩍 넘을 정도 분량이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쥔 돈은 고작 3600원에 불과했다. 천씨는 "이마저도 마음씨 좋은 고물상이 후하게 쳐준 것"이라고 했다.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냐'고 묻자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아졌다"며 "오늘도 아직 아침을 먹지 못했다"고 말했다.

◇9개월새 폐지 가격 '3분의 1 토막'…경기 둔화에 수집 노인 '직격탄'

폐지 가격이 급락하면서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고령 빈곤층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내외 경기 둔화에 당분간 폐짓값이 오를 가능성도 낮아 이들의 생활고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서울 지역 고물상에서 거래되는 폐지 가격은 1㎏당 40~50원대 수준이다. 지난 2월 120원에서 3분의 1 토막이 난 셈이다.

폐지 가격이 하락한 이유는 골판지 수요가 감소한 상황과 맞물려 있다. 골판지는 폐지를 재활용하는 대표 품목으로 포장 상자 등의 원료다. 국내외 경기가 둔화하며 포장 제품 수요가 줄자 폐지 가격도 따라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제지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51만톤(t)이었던 국내 골판지원지 생산량은 올해 8월 46만톤으로 감소했다.

업계 관계자는 "폐지 사용량은 민간 경제성장률과 연동된다"며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는 소비가 위축돼 포장 제품을 덜 쓰게 되고 이에 따라 폐지 가격이 하락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자원재생' 기여에도 시급은 '948원'…장시간 노동 시달려

국내 폐지 재활용에 폐지 수집 노인들의 기여도는 적지 않다. 지난 9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의원실에 보고한 '폐지수집 노인 현황과 실태'에 따르면 이들 노인이 수집한 폐지는 하루 폐지 재활용 물량의 20.6%를 차지한다.

아파트를 제외한 단독주택, 빌라로 범위를 좁히면 재활용률은 60.4%에 달했다. 연구원은 연평균 24만6000톤의 폐지가 노인의 손에 의해 재활용되는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그러나 폐지 수집 노인이 받는 평균 시급은 단 '948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은 폐지수집 노인이 하루 평균 11시간 동안 12.3㎞를 이동해 1만428원을 버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조차 폐지 1㎏당 가격이 120원이었던 지난 2월 시세를 기준으로 작성된 연구결과다. 현재 폐지수집 노인 소득은 더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 운동 삼아 폐지수집을 해왔다는 류봉삼씨(80)는 "폐지 가격이 많이 내려가서 이제는 용돈벌이도 안 된다"며 "당분간은 더 어려운 분들이 주울 수 있도록 잠시 쉬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배재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연구위원은 "생계형으로 폐지 수집을 하는 노인은 다른 생계수단이 없기 때문에 현재처럼 폐지 가격이 낮은 상황에서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폐지 산업 전반에 찬바람이 불면서 폐지수집 노인들의 생계는 더 위태로워지고 있다. 골판지 수요가 줄면서 전국 폐지 압축상과 제지 공장에도 폐지 재고가 쌓이는 중이다. 통상 국내 제지공장의 폐골판지 재고량은 7만~8만톤 정도지만, 9월 기준 재고량은 15만톤 수준으로 파악됐다.

폐지를 모아 압축상에 보내는 고물상들도 울상이다. 서울 시내 한 고물상 관계자는 "압축 공장에서도 폐지를 가려 받는다"며 "폐지는 부피가 커 물을 뿌려 숨을 죽여 보관·운반했는데 이젠 이렇게 하면 아예 안 받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물상 관계자도 "압축상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폐지를 쌓고 있다"고 전했다.

◇'공공형 일자리' 등 입법 움직임…국회 문턱 넘어야 실현 가능

전문가들은 폐지수집 노인이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자원 재생뿐만 아니라 노인 일자리 창출까지 고려한 '단계적 접근'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배 연구위원은 "폐지수집을 관리해 주는 형태로 출발해 안전지킴이 사업 등 다른 유형의 일자리로 전환되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정책 지속성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전수조사 등에 나설 차례"라고 설명했다.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폐지를 매입해 '업사이클링'하는 방식으로 폐지수집 노인을 지원하는 민간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는 "1㎏당 300원 고정가로 매입한 폐지는 350여명의 작가의 재능기부를 통해 캔버스아트로 재탄생한다"며 "캔버스 제작과정에서는 어르신들을 고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 대표는 이어 "정부에서 '폐지 매입 최저 보상제'를 적용해 '자원재생활동가'로 일자리 화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국회도 폐지수집 노인을 지원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강선우 의원은 "실태조사를 통해 폐지수집 어르신을 공공형 일자리와 연계하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 의원은 국회 입법조사처에 노인복지법·고령자고용법 개정 조사를 의뢰한 뒤 11월 중 발의할 계획이다.


다만 이 같은 법률 개정안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대 국회에서 이명수 의원이 재활용품을 수거해 판매한 금액에 비례해 수거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담은 '재활용품 수거노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배 연구위원은 "폐지수집 노인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만큼 결국 국회가 움직여서 근거 법률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