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보행자 사고는 신호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초록불이라도 보행 속도와 몸 상태, 짐의 무게, 목적지까지의 동선에 따라 체감 시간은 달라진다. 시장과 병원, 약국, 버스정류장이 몰린 생활권에서 횡단보도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경동시장 인근 현장을 통해 들여다봤다.<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초록불 켜지고 바로 걸어도 중간쯤 가면 마음이 급해요."
지난 23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 인근 횡단보도 앞. 장바구니를 든 70대 노인 A씨는 신호등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약국과 병원, 시장, 버스정류장이 몰린 이 일대에서는 보행신호가 켜질 때마다 노인과 손수레를 끄는 시민, 전동휠체어 이용자가 한꺼번에 길을 건넜다.
이곳 신호는 짧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잰 주요 보행신호는 40초 이상이었다. 일반 성인 걸음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기자가 보폭을 줄이고 고령 보행자 속도에 맞춰 걸어보니,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잔여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신호가 켜진 뒤 바로 출발하지 못하거나 장바구니를 든 채 속도가 늦어지면 40초대 신호도 넉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숫자상 짧지 않은 초록불 신호, 현장에선 달라
경동시장 주변은 서울에서도 고령 보행자가 많은 곳이다. 청량리청과물시장, 서울약령시장, 병원, 약국,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가까이 붙어 있다. 장을 본 시민들은 양손에 검은 봉투나 장바구니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고, 일부는 신호가 바뀐 뒤에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70대 노인 B씨는 "파란불이 들어와도 바로 못 나갈 때가 있다"며 "사람이 많으면 서로 부딪힐까 봐 먼저 지나가라고 보고 걷는다"고 말했다. 그는 "손에 든 게 무거우면 걸음이 더 늦다. 젊은 사람처럼 빨리 못 간다"고 토로했다.
카카오맵 거리재기와 서울시 대로변 횡단보도 위치정보를 함께 살펴보니, 경동시장과 청량리청과물시장 인근 제기동·전농동 일대에는 30m를 넘는 대로변 횡단보도 구간이 여럿 있었다. 서울시 자료의 링크 길이 기준으로 38.415m, 40.501m, 53.258m 구간도 있었다.
40m 안팎 횡단보도는 일반 성인에게 크게 부담되는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고령 보행자는 출발부터 시간이 걸린다. 신호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옆 사람을 피하고, 차량 진행 방향을 본 뒤 걷기 시작한다. 손수레나 보행보조기를 쓰면 방향을 잡는 데도 몇 초가 더 든다.
기자가 보폭을 줄여 다시 건너보니 횡단보도 중간부터 걸음이 빨라졌다. 실제로는 빨리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급해졌다. 옆에서 장바구니를 든 노인은 잔여 시간을 보며 "이럴 때는 뛰고 싶어도 못 뛰지"라고 푸념했다.
돌아가기보다 바로 건너는 어르신
이날 현장에서는 무단횡단도 확인됐다. 일부 시민은 횡단보도 밖 도로를 건넜다. 가까운 약국이나 시장 입구, 버스정류장으로 바로 가려는 움직임이었다.
한 60대 남성은 "횡단보도까지 가면 돌아가야 하잖아요"라며 "차 없을 때 얼른 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잘하는 건 아닌데, 다리가 아프면 멀리 돌아가는 것도 힘들다"고 덧붙였다.
신호 시간이 부족해서만 생기는 행동은 아니었다. 실제 목적지와 횡단보도 위치가 어긋나 있을 때, 고령 보행자는 돌아가는 길보다 짧은 길을 택하기 쉬웠다. 병원에서 약국으로, 시장에서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는 길은 짧았지만 도로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전동휠체어를 탄 시민도 신호가 켜진 뒤 천천히 횡단보도에 진입했다. 일반 보행자보다 출발과 방향 전환에 시간이 더 걸렸다. 손수레를 끄는 시민은 횡단보도 턱과 보도블록 사이에서 속도를 줄였다. 같은 초록불이라도 사람마다 쓸 수 있는 시간은 달랐다.
시장 주변에 반복된 고령 보행 사고
경동시장 일대는 고령 보행자의 위험이 반복해서 확인된 장소 중 하나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4-2018년 서울 노인 보행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구간은 '청량리 경동시장로'다. 5년간 사고 건수는 54건이었다.
이후 서울시는 이 일대에 폭 2.7m 보행로를 새로 만들고 전통시장 주변 보행환경 개선 공사를 진행했다. 차량과 보행자를 분리하고 보행 공간을 넓히는 방식이었다. 사고가 많았던 시장 주변을 손본 것이다.
다만 경동시장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병원, 약국, 시장, 버스정류장이 가까운 지역에서는 비슷한 보행 위험이 생긴다. 고령 보행자가 많고, 짐을 든 사람이 많고, 차량 흐름이 복잡한 곳에서는 신호 시간만으로 안전을 설명하기 어렵다.
전국 통계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경찰청과 도로교통공단의 2025년 교통사고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4년 보행자 교통사고는 3만5356건이었다. 보행자 사망자는 926명으로 전년보다 6명 늘었다. 고령 보행자 교통사고는 1만1498건으로 전년보다 197건 증가했다. 고령 보행자 사망자는 619명이었다.
느린 보행자를 기준으로 바꾸는 시도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행신호 기준도 일부 달라지고 있다. 일반 횡단보도 보행신호 시간은 보행속도 1m/s를 기준으로 한다. 횡단보도 길이 1m당 1초를 주고, 진입시간 7초를 더하는 방식이다.
노인보호구역과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보행속도를 최대 0.7m/s로 낮춰 계산한다. 같은 길이의 횡단보도라도 교통약자가 많은 곳은 보행신호가 더 길어질 수 있다.
서울시는 2024년 서울경찰청, 자치경찰위원회와 함께 고령자 등 교통약자 통행이 많은 횡단보도 보행신호 시간을 3-6초 늘리는 사업도 추진했다. 일부 지자체는 인공지능(AI) 영상분석으로 횡단보도 안에 보행자가 있으면 신호를 자동 연장하는 스마트 횡단보도도 도입하거나 시범 운영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보행 약자가 직접 보행 시간을 늘릴 수 있는 장치도 운영된다. 싱가포르의 '그린맨 플러스'는 고령자와 장애인이 교통카드를 횡단보도 단말기에 대면 보행신호 시간이 늘어나는 방식이다. 일반 보행자와 같은 신호를 기다리되, 필요할 때 더 긴 횡단 시간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홍콩도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스마트 장치를 운용하고 있다. 홍콩은 교통카드인 옥토퍼스 카드나 지정 카드를 신호기 단말기에 대면 보행 시간이 늘어나는 장치를 안내한다. 보행 속도가 느린 사람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횡단보도 체계 안에서 필요한 시간을 더 주는 방식이다.
영국 일부 지역에서 쓰이는 '퍼핀 횡단보도'도 참고할 만하다.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남아 있는지 감지해 차량 신호 전환 시점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버튼을 누른 뒤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끝나는 구조가 아니라, 실제 보행자 움직임을 신호 운영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국내 스마트 횡단보도와 닮아 있다.
휭단보도 초록불 깜빡이…모두에게 같지 않아
경동시장 인근 횡단보도는 신호 시간만 보면 짧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현장에서 확인한 신호는 40초 이상이었고, 일반 성인 보행자는 대부분 신호 안에 건넜다. 하지만 고령 보행자의 걸음으로 다시 보면 초록불의 의미는 달라졌다.
신호가 켜진 뒤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 몇 초, 장바구니 무게, 보행보조기와 손수레, 우회전 차량을 살피는 시간이 횡단 시간을 달라지게 했다. 특히 시장과 병원, 약국, 버스정류장이 가까이 붙어 있는 곳에서는 보행자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길을 건넌 뒤 다시 짧은 거리를 옮겨야 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횡단보도 위치와 실제 목적지가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결국 이 지역에서 확인한 고령자 보행 위험은 초록불 길이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같은 40초라도 빈손으로 걷는 사람과 장바구니를 든 사람, 보행보조기를 끄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르게 쓰였다. 횡단보도 끝에 도착한 뒤에도 곧바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잠시 멈춰 서는 노인들이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한 70대 시민은 손에 든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그는 신호등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은 금방 가죠. 우리는 빨리 걷고 싶어도 그렇게 안 돼요. 파란불이 길어 보여도 건널 때는 짧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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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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