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치매 아버지 통장에 2억 있는데 쓸 수가 없어요"

2026.03.07 08:30  




[파이낸셜뉴스] “아버지 은행 계좌에 2억원이 있다. 그런데 쓸 수가 없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현정수씨(55·가명)는 몇 달 전 은행 창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요양시설 입소 비용과 병원비로 1000만원가량이 급하게 필요했지만, 치매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계좌 이체 동의 절차를 이해하지 못했다. 금융기관은 분쟁을 우려해 거래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은 성년후견 개시를 신청했고, 법원 결정이 나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 병원비는 자녀 몫이었다. 현씨는 “결국 보유하고 있는 돈을 먼저 쓸 수 밖에 없었다. 억울하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돈이 있는데 못 쓰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치매로 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의 ‘사용’을 멈춘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자산 보유 치매환자 1인당 평균 2억원


‘치매머니.’ 최근 언론과 금융권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일본에서 먼저 사용된 ‘인지증머니(認知症マネー·치매머니)’라는 표현이 국내에 들어왔다. 2010년대 중반 일본이 초고령사회에 본격 진입하면서, 치매로 인해 고령자의 자산이 사실상 동결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치매머니란 쉽게 말하면 치매로 판단 능력이 저하되면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게 된 자산을 뜻한다. 예금, 주식, 보험, 부동산 등 명의는 본인에게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용이 제한된 돈이다.



서울대 건강금융센터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분석에 따르면 2023년 기준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약 124만명이다. 이 가운데 자산을 보유한 사람은 76만명으로, 10명 중 6명 이상이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보유한 소득 및 재산 총액은 약 154조원. 자산을 보유한 76만명을 기준으로 하면 1인당 평균 약 2억원 수준이다. 부동산 자산이 약 114조원(74.1%)으로 가장 많고 금융자산 약 33조4000억원(21.7%) 수준이다.

2025년 기준 50대 가구주의 순자산 규모는 5억5161만원. 이를 고려하면 치매는 더 이상 ‘빈곤층의 문제’가 아니다. 중산층과 자산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2050년 488조원… 멈춘 돈은 늘어난다


보건복지부 추계에 따르면 치매 환자 보유 자산은 2025년 172조원, 2030년 220조원, 2040년 351조원, 2050년에는 488조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건복지부는 치매로 의사결정이 어려워질 경우 사실상 동결될 수 있는 자산 규모를 가정해 이같이 전망했다.

고령화 속도가 붙을수록 치매머니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자산이 원활히 순환하지 못한다면 개인 가계뿐 아니라 실물경제에도 부담이 된다.

본질은 ‘보유와 통제의 분리’


치매머니의 본질은 ‘보유와 통제의 분리’다.

자산을 가지고 있어도 판단 능력을 잃으면 실제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치매 진단 이후에는 계약 체결 능력이나 의사 표시 능력에 대한 확인이 필요해 금융기관은 본인의 명확한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거래를 제한한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법적 권한이 없다면 계좌 인출이나 자산 처분이 쉽지 않다.

실제 현장에서는 “소유주가 분명한데 왜 돈을 못 쓰느냐”는 질문이 반복된다. 그러나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가족 간 분쟁 가능성을 고려해 대리 인출이나 계좌 거래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고액 거래는 물론 소액 이체조차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 사이에도 비용은 계속 발생한다는 점이다. 치매는 의료비와 돌봄 비용을 늘리는 동시에 자산 사용을 어렵게 만든다. 결국 은퇴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지속 가능한 현금흐름이 끊길 수 있다.

성년후견 제도 같은 장치가 존재하지만 신청부터 법원의 개시 결정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병원비와 돌봄 비용은 계속 쌓인다. 결국 치매머니 문제의 핵심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준비에 있다.

치매머니를 막는 방법은 두 갈래


치매머니의 핵심은 병이 아니라 구조다. 돈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쓸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문제다. 치매머니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축이다.

① 자산 구조를 미리 설계하는 것

△임의후견제도 활용

많은 가족이 치매 진단 이후 성년후견을 신청한다. 그러나 법원 판단까지 수개월이 걸린다. 그 사이 병원비와 요양비는 계속 나간다. 사고가 난 뒤 보험을 드는 셈이다. 반면 임의후견제도는 다르다. 인지 능력이 있을 때 미리 후견인을 지정해두는 방식이다. 판단 능력이 약해지면 그 계약이 효력을 발휘한다. 사전 설계다.

△치매안심신탁… 돈의 ‘자동 경로’

금융권에서는 치매안심신탁이 확산되고 있다. 건강할 때 은행과 계약을 맺고, 치매 판정 시 요양비·생활비 등 특정 용도로만 자금이 집행되도록 미리 설정하는 방식이다. 장점은 명확하다. 자녀 간 분쟁을 줄이고 간병 자녀의 오해를 막고 보이스피싱 위험을 차단한다. 돈의 흐름을 사전에 정해두는 것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마련

설계가 부담스럽다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 고액 이체 알림 설정, 보험 수익자 명확화, 자산 목록 문서화, 형제자매 역할 합의 등이다. 치매 진단 이후에는 선택지가 줄어들고, 절차는 복잡해진다. 그래서 사전 설계가 강조된다.

그러나 완벽한 금융 안전망을 짜두더라도 가장 확실한 자산 방어는 결국 치매 발병 자체를 늦추는 것이다. 의료계가 강조하는 ‘경도인지장애’ 시기의 골든타임이 곧 재무적 골든타임인 이유다.

② 발병 시점을 늦추는 것

치매는 완전히 막을 수 있는 병은 아니다. 그러나 진행을 늦추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 의료계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반복적 기억 저하, 계산 실수 증가, 성격 변화 등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전문 진료를 권한다. 보건복지부와 치매안심센터는 인지선별검사(CIST 등)를 무료로 제공한다.

최호진 한양대구리병원 신경과 교수는 "아쉽게도 현재까지 치매를 호전시키거나 완치시킬 수 있는 약은 없는 만큼, 치매의 골든타임인 경도인지장애 단계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상인의 경우에는 매년 1~2%가 치매로 진행되는데 반해 65세 이상의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10~15%가 치매로 이환된다"면서 "치매의 고위험군으로 볼 수 있는 만큼 경도인지장애가 의심된다면 적극적인 검사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예방 전략은 △고혈압·당뇨 등 혈관 질환 관리 △주 3~5회 유산소 운동 △외국어 학습·악기 연주 등 두뇌 자극 △사회적 네트워크 유지 △충분한 수면 등이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활동이다. 가장 수익률 높은 재테크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해외는 ‘사전 설계’ 제도화로 방어


초고령사회에 먼저 진입한 나라들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설계’를 택했다.

△일본

일본은 ‘가족신탁’ 제도가 확산됐다. 판단 능력이 있을 때 자산 관리 방식을 미리 계약으로 정한다. 치매 이후에도 지정된 수탁자가 자산을 운용할 수 있다.

△미국

미국은 ‘Trusted Contact’ 제도를 도입했다. 고령자의 계좌에서 이상 거래가 발생하면 금융기관이 지정된 연락처로 통보한다. Senior Safe Act를 통해 의심 거래를 일시 중단할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영국

영국은 LPA(Lasting Power of Attorney) 제도를 통해 미리 대리인을 지정한다. 판단 능력 상실 시 즉시 재산 관리가 가능하다.

공통점은 명확하다. 치매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구조를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내놓은 ‘제5차 치매관리종합계획(2026~2030)’에 공공후견 확대, 재산관리 지원 시범사업, 금융사기 예방 체계 강화를 포함했다. 치매 정책이 의료·돌봄에서 금융·법률 영역까지 확장된 것은 진전이다.

은퇴자 X가 지금 해야 할 점검


□ 부모 자산의 위치와 구조를 알고 있는가

□ 보험 수익자 지정은 명확한가

□ 의료·요양비 예상 규모를 계산해봤는가

□ 형제자매 간 역할은 합의돼 있는가

□ 고액 이체 알림 등 금융 안전망을 설정했는가

□ 무엇보다 ‘판단 능력이 있을 때 정하자’는 대화를 시작했는가

치매는 노년의 질병이지만 준비는 미리 진행해야 한다. 설계하지 않으면 갖고 있는 돈이 '내 돈'이 아닐 수 있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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