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 조수빈을 마주했을 때 앵커 시절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정한 재킷 차림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한결 가볍고 편안했다.
"방금 유튜브 촬영 끝나서 난장판이에요. 하하. 그래도 스튜디오 나름 예쁘지 않나요? 돈 안 들이고 제가 다 꾸민 거예요."
완벽해 보이던 이미지 틈으로 소탈한 매력이 엿보였다. 2005년 KBS에 입사해 간판 앵커로 활약했던 그는 2019년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정해진 틀 안에서 말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유튜버이자 크리에이터로 살고 있다. "40대인 지금이 20대 때보다 더 즐겁다"는 조수빈과 나란히 앉아 80분간 대화를 나눴다.
◆"정치 말고 내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조수빈의 유튜브 채널 '조수빈큐레이션'은 구독자 16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경제·투자부터 인테리어, 책 리뷰까지 다루는 주제도 폭넓다.
"시작은 2019년 대학원 숙제였어요. '자기 유튜브 채널 만들기'가 과제였거든요. 그때는 유튜브를 잘 몰랐고, 그냥 싸이월드 하듯이 시작했죠. 차 바꿀 때 돼서 차 영상 찍고, 집 공사하니까 인테리어 영상 찍었는데 반응이 터지더라고요. 거창한 전략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제 관심사가 흘러가는 대로 둔 거죠. 제 채널이 맥락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제 삶의 궤적, 즉 '바이오그래피'를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사실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인 그에게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시사·정치' 콘텐츠다. 주변에서도 "앵커 출신이 왜 정치 유튜브를 안 하냐"는 조언이 쏟아졌다. 하지만 조수빈은 단호했다.
"유튜브판에서 정치 콘텐츠는 한쪽으로 치우쳐야 빨리 성장해요.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속도가 좀 느리더라도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이야기로 소통하고 싶었거든요."
정치 이슈에 올라타는 '지름길' 대신, 그는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자신만의 길'을 택했다.
조수빈은 "아나운서라는 직업 자체가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며 "관심사가 바뀌어도 어려운 주제를 공부해, 그 과정을 스토리텔링하듯 쉽게 전달하는 게 내 재능"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구독자가 엄청나게 많기보다는, 아는 사람이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해 주는 '부티크 채널'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유튜브는 그에게 경력의 생명력을 연장해 준 고마운 무대이기도 하다. 조수빈은 "유튜브가 없었으면 44세인 지금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며 "KBS에 입사할 때만 해도 40대 넘은 여자 아나운서가 계속 방송에서 일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저는 유튜브가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재밌어요. 이걸 안 했으면 책이나 전시회를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았을 텐데, 유튜브 덕분에 세상과 접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참 고맙죠. 정서적으로 위안도 많이 받았습니다."
◆냉철한 뉴스 앵커? 사실은 감성파
대중은 그를 이성적인 뉴스 앵커로 기억하지만, 실제 조수빈은 MBTI가 'ENFP'인 감성파다. 그는 뉴스 앵커 시절이 "영광스럽고 감사했다"면서도 "사건·사고를 전달하며 '메소드 연기'를 하듯 감정 이입을 너무 많이 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뉴스를 진행하지만, 참사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 때면 속으로는 앓았어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고요. 피해자 인터뷰를 하고 나면 그 잔상이 오래 남아서,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피해자 가족분들이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일까. 그가 방송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은 것은 화려한 9시 뉴스 앵커석이 아니다. 오히려 입사 초기 강릉 KBS 시절의 라디오 DJ 활동을 '화양연화'로 기억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가 개봉한 뒤 강릉으로 갔어요. 실제 영화 속 이영애 씨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제가 마이크를 잡았죠. 하루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제 목소리만 듣고 알아보시더라고요. 그 인간적인 교감이 너무 좋았어요."
조수빈은 "암 투병 중이던 청취자분이 '아파서 잠 못 드는 새벽마다 목소리를 들으며 견뎠는데 마지막이라니 무슨 낙으로 사냐'는 사연을 보내온 적도 있다"며 "그 사연을 읽고 방송국 복도에서 두 시간을 펑펑 울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때처럼 사람들과 숨 쉬며 교감하는 시간이 그리웠다"고 했다.
"많은 분들이 저를 9시 뉴스로 기억하지만, 9시 뉴스를 하고 나니까 오히려 예능이나 라디오를 할 기회가 잘 오지 않더라고요. 근데 유튜브는 내가 원하면 라디오 DJ가 될 수도 있고, 책 리뷰도 하고, 영화 이야기도 해볼 수 있는 분출구라서 좋아요. 20~30대 때 방송할 때보다 지금이 더 재미있게 일하고 있어요."
◆집에선 '허당 엄마'…조수빈의 N번째 도전
2011년 금융업 종사자와 결혼해 12세 딸과 9세 아들을 둔 조수빈은 집에선 어떤 엄마일까.
그는 자신을 "아이들에게 아주 만만하고 리버럴한 엄마"라고 소개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워낙 점잖은 '선비' 스타일이라 훈육이나 규칙은 남편 몫이고, 저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아이들이 저를 얼마나 편하게 생각하냐면 '엄마는 화장발이잖아'라고 놀린다니까요(웃음)."
유명 유튜버들을 즐겨보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채널은 냉정한 평가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아이들이 '엄마는 아나운서인데 왜 이렇게 엄마 유튜브 보는 사람이 없어?'라고 묻기도 한다"며 "집에서는 그냥 만만한 엄마일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집에서의 '허당 엄마'와 달리, 일에서는 또 다른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프리랜서 생활이 외롭기도 했는데, 다시 대학교라는 조직에 들어가니 좋더라고요. 유튜브를 하면서 2030 제작진과 계속 호흡을 맞춰와서 그런지, 학생들과의 소통에 대한 걱정은 없어요."
아나운서, 유튜버, 그리고 교수까지. 숨 가쁘게 역할을 바꿔가며 달리는 조수빈의 다음 목표는 의외로 소박하면서도 엉뚱했다.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헬스·요가·필라테스까지 매일 하죠. 가족들이 '왜 이렇게 미쳐서 운동하냐'고 묻는데, 저는 50대부터 '운동 유튜버'를 할 거라고 해요. 50, 60대가 넘어서도 몸이 탄탄하면, 그때는 야하다기보다는 건강하고 멋져 보이지 않을까요? 아, 이거 '영포티'인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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