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매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기사가 있다. 어느 기업이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수백 수천명이 일자리에서 내몰린다, 상당 규모의 위로금을 포함한 '위로금 패키지'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기사다.
올해도 비슷한 분위기다. 스타트는 LG그룹이 끊었다. LG유플러스, LG전자, LG디스플레이가 희망퇴직을 진행중이다. 롯데그룹 계열의 세븐일레븐, SK그룹 일부 계열사의 희망퇴직 내용도 나온다. 어느 기업이 또 뒤를 이을 지 걱정이다. 추운 날씨가 더 춥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조직 효율화와 세대교체라는 명분 아래 진행되지만, 결과적으로는 '평생직장'이라 믿었던 일터의 문이 50대부터 닫히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MZ세대’처럼 이직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충성스럽게 한 회사에서 버텨온 X세대에게 퇴직 통보는 곧 정체성의 붕괴다.
"희망퇴직으로 28년 다닌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 것인지." 한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허탈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주된 일자리의 퇴진이 곧 인생의 종착점은 아니다. 마음을 다잡고 눈을 낮추면 ‘갈 곳’은 있다. 실제 이 카페 다른 글에서는 '명퇴 후 재취업 했습니다. 첫 월급 타서 통닭에 생맥주로 축하했습니다. 이 나이에 과분한 월급입니다'라는 글도 있었다.
'그 날'이 끝은 아니다. 숨을 고르고 한 걸음만 떼면 길이 보인다. 이번 기사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다음 기사에서는 실제로 움직이는 재취업 로드맵을 공개한다. 실업급여 체크, 정부 센터 활용법, 단기 전환 교육 과정 등을 안내한다.
"회사를 떠나던 날, 집에 가는 게 두려웠다"
"회사를 떠나던 날, 집에 가는 게 두려웠다. 가족에게 이미 얘기를 했지만 막상 '그 날'이 되자 막막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집 안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할 것 같았고."
지난해 12월, 23년 다닌 중견기업을 퇴직한 박성훈(58)씨의 고백이다. 퇴직금은 억 단위였지만,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3월부터 이력서를 30곳에 넣었지만 면접 연락조차 없었다. 그렇게 다시 3개월이 방황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10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한 중소기업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연봉은 이전에 비해 30% 이상 줄었지만 표정은 밝다. "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포기하지 않고 준비했더니 길이 보이더라."
법적 정년은 '60세', 현실은 '49.3세 퇴직'
박씨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대한민국 중장년층이라면 대부분 겪은, 혹은 곧 겪을 현실이다.
실제 국가데이터처 조사(2021년 5월 기준)에 따르면 55~64세가 주된 일자리를 떠난 평균 나이는 49.3세다. 정년으로 퇴직한 사람은 9.6%에 불과했다. 10명 중 9명은 권고사직, 명예퇴직,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섰다. 법적 정년은 60세지만, 일터의 문은 50세 전후에 닫히는 셈이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더 명확하다. 55세 기준으로 '주된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47.9%에 불과하다. 절반 이상은 커리어의 정점이자 가장 안정적이었던 일자리에서 물러났다. 60세가 되면 이 비율은 37.6%로, 65세엔 26.3%로 더 떨어진다.
문제는 가계의 짐은 그대로 인데 수입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자녀는 대학생, 노부모는 건재하고, 집 대출은 남았다. 매년 100만명씩 태어나 평생 경쟁해온 X세대가 노후를 위한 '제2의 인생'을 놓고도 경쟁해야 하는 이유다.
381만원 vs. 200만원...희망과 현실의 간극
주된 일자리에서 나왔지만 일은 계속 해야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퇴직자 10명 중 4명(39.8%)은 75세까지 일한다. 생계를 위해서든, 사회적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서든,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을 확보하기가 쉽지는 않다.
재취업의 관건은 임금이다. 원하는 임금 수준과 기업들이 제공하겠다는 연봉에는 간극이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6월 4050 중장년 구직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재취업 인식 조사에 따르면 이들이 원하는 평균 연봉은 4149만원으로 집계됐다. 서울시가 지난 9월 진행한 '서울시 중장년 정책포럼 2025'에 따르면 서울 중장년의 평균 희망 월급은 381만원,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임금은 331만원으로 조사됐다.
반면 기업들이 중장년 구직자들에게 줄 수 있는 돈은 구직자들의 기대만큼 넉넉하지 않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발표한 기업 수요조사에 따르면 제공할 수 있는 임금수준은 200만~300만원 미만이 가장 많았다. 중장년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기업은 57.1%로 절반을 넘었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구직자가 원하는 금액과 기업이 제시하는 금액 사이엔 최소 31만원, 최대 181만원의 격차가 존재한다. 이 간극 앞에서 급한 쪽은 결국 구직자다.
그래서 많은 50대가 이 지점에서 멈칫한다. "여기까지 내려가야 하나? 이제 나는 어떤 사람인걸까?”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 순간 필요한 건 포기가 아니라 정리와 재설계다. 기준을 낮추는 게 아니라, 방향을 새로 잡는 과정이다. 그렇게 마음이 단단해지면 비로소 다음 단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왕년의 명함은 버려라" - 헤드헌터의 냉정한 조언
"이전 직장에서 말입니다. 정말 잘 나갔는데...밑에 직원들도 많았고. 참 좋았는데." "이 정도 수준의 일 밖에는 없는 건가요? 좀 더 좋은(?) 곳 없을까요?"
재취업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가장 빠르게 재취업에 실패하는 말'이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왕년의 명함은 버리세요." "만나본 50대 구직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내가 왕년에 말야...'로 시작하는 겁니다." 헤드헌터들이 꼽은 중장년 구직자의 대표적 실패 원인이다. 특히 대기업 출신일수록 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
현장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재취업 성공 5계명을 정리했다.
1. 과거 명함 버리기. 회사, 직책을 떠나 개인으로서 자신을 객관화하라. 이전에 뭘 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2. 이력서는 구인자 시각으로. 이것저것 다 하는 제너럴리스트보다 뭔가 특출나게 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유리하다. '핵심 역량'을 명확히 하고 적극 표현하라.
3. 디지털 역량은 필수. 높은 직급일수록 직접 문서 작성을 안 해 컴퓨터 사용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공지능(AI) 활용은 필수다. 페이스북, 링크드인, 리멤버 등 소셜미디어에 구직 상태를 알리는 것도 좋다. 사람인, 잡코리아 등 잡포털에 최신 이력서를 등록하라.
4. 눈높이를 현실에 맞춰라. 헤드헌터기업 더라이징스타헤딩의 강석윤 상무는 '힘'을 빼야 한다고 조언한다. "눈을 낮추고 찾아보면 갈 자리는 있다. 그러나 연봉이 적어서, 직급이 낮아서 '안 간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고 말했다.
5. 자격증과 체력 직종, 현실적으로 보라. 많은 자격증 보다는 취업이 유망한 것에 집중하라. 택시, 보험 등 허들이 낮은 직종에 대해서는 50대 이상은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고려하라.
X세대의 제2막, 준비하면 열린다
1997년 겨울, X세대는 직장에서 처음으로 '정리해고'라는 단어를 배웠다. 사회 초년생이던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이에 말이다.
대우, 한보, 기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짐을 싸들고 나오는 직장 선배들을 봤다. "내일은 나일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일상이었다. 실업률은 7.2%까지 치솟았고, 길거리엔 'IMF 극복' 현수막이 나뭇잎처럼 흔했다.
하지만 X세대는 그 위기를 견뎌냈다. 야근하고 주말에도 일했다. 치열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의 위기 앞에 서 있다.
1997년엔 막막했다.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정보가 없었고, 지원 제도도 미비했다.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25년의 X세대는 다르다. 정부가 다양한 지원과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20~30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제는 그 영화의 메시지를, 이제는 '행복은 연봉순이 아니다'로 바꿔야 할 때다.
중요한 건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만족이다. 이전 회사 동료가 어떻게 보든, 친구들이 뭐라 하든,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성공이다. 준비하는 우리에게 제2막은 이미 시작됐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