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고승아 기자 = 임선애 감독(45)이 4년 만에 두 번째 장편 영화 '세기말의 사랑'을 선보였다. 스토리보드 작가로 활약하다 2020년 장편 데뷔작 '69세'로 호평을 얻었던 임 감독은 10년여 전에 써놓은 시나리오를 다시 작업해 '세기말의 사랑'으로 탄생시켰다.
24일 개봉한 '세기말의 사랑'은 세상 끝나는 줄 알았던 1999년,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에게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뉴 밀레니엄 드라마다. '69세'를 선보였던 임선애 감독의 신작이다.
이유영은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지닌 '미쓰 세기말' 영미 역을 맡았다. 임선우는 '미세스 새천년' 유진 역으로 분했다. 도영(노재원 분)을 사랑한 두 사람이 뜻하지 않게 같이 살아가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2000년의 분위기에 풀어냈다.
임 감독은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세기말의 사랑'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고 뉴스1과 이야기를 나눴다.
-'69세' 이후 4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첫 작품 후반 작업할 때 주변에서 '빨리 준비해야 한다, 한 편하고 사라지는 감독이 많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에 시나리오도 받아봤는데 마음이 닿지 않더라. 그래서 내가 쓴 얘기 중에 어떤 걸 다음으로 해볼까 하다가, 10년 전에 썼던 시나리오인데 다시 꺼내봤다. 원래 이 작품('세기말의 사랑')으로 데뷔하고 싶었다. 하다만 숙제 같아서 이번에 제대로 끝내 보자 생각해서 두 번째 작품으로 '세기말의 사랑'을 하게 됐다. 물론 영화는 결국 돈이 있어야 하는 건데 운이 좋게 제작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내 의지뿐만 아니라 제작자 의지도 같아야 영화가 들어가는데 '69세'를 같이 했던 제작사 대표님과 또 하게 돼서 편안하게 작업했다. 4년 만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과정도 충분했고, 배우 캐스팅에서도 어렵지 않게 선택해 주셔서, 4년 정도 준비하면서 작품 하나 만드는 게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다시 작업하면서 1999년도로 배경을 바꾼 이유가 있나.
▶2012년에 이 시나리오를 썼는데, 당시엔 2012년으로 썼다. 근데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낡아 보이더라. 시나리오를 고쳐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하다가 영미를 상상해 봤고, 이 친구가 자기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인물인데 고백하려면 무언가 엄청난 큰 계기가 있어야겠더라. 그렇다면 세상이 멸망할 정도의 사건이어야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서 세기말, 1999년으로 선택했다. 또 영미를 지칭하는 특정한 별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흔히 '세기말 같다'는 표현이 혼란스럽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영미에게 세기말이라는 별명을 붙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제목의 '세기말의 사랑'은 중의적인 표현이 됐다. 그렇게 제목을 쓰고 보니 시나리오 작업하는데 동력도 생겼다.
-임 감독 본인은 1999년에 어떻게 지냈나. 그때 감상이 영화에 반영되기도 했나.
▶진짜 종말이 올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정전이 된다거나, 컴퓨터가 혼란이 와서 전산장애가 올 수도 있단 생각에 사재기를 막 했었다.(웃음) 당시 나는 영화에 막 입문했을 시기였다. 대학에 점수를 맞춰 가는 분들도 있지 않나. 나도 그랬어서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뭔가 어떤 일이 크게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시기가 혼란스럽지만 기대가 되는 시기였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실 2000년이 올 거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불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던 그런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겪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내 안에 있던 감정들과 잘 녹여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독특한 영미에 이유영을 캐스팅한 이유는.
▶영미는 개성 강하고 독특한 캐릭터라, 어글리한 외모를 지닌 배우를 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 선입견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주근깨, 안경 이런 걸 보통 미디어에서 보여주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배우가 가진 모습에서 어떻게 하면 기존 연기에서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이 들더라. 그 점에서 유영씨가 도화지 같은 배우였다. 이전에도 다양한 역할을 했었지만 유영씨가 가진 동그랗고 귀여운 느낌이 있는데 그 안에 '똘끼'가 느껴졌다. 또 영미는 유영씨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역할이지 않을까 해서 시나리오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는데, 오래 끌지 않고 거의 바로 답을 주셨다. 촬영 들어가서는 유영씨가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서 매번 '이렇게 해볼까요, 저렇게 해볼까요' 했다. 매일 유영씨가 어떻게 연기를 할지 기대하면서 봤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틀어서 보여줄 때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매번 놀라웠다.
-장애가 있는 유진으로 분한 임선우의 연기도 눈길을 끌었는데, 어떻게 캐스팅했나.
▶영미가 먼저 캐스팅된 다음에 유진을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미와는 다른 예쁨을 보여주고 싶었고, 유영씨가 동글동글 귀여운 상이라서 유진이 시니컬하고 도도한 이미지이길 원했는데, 독립영화에서 본 선우씨 연기가 정말 좋더라. 선이 고전적인데 땍땍거리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해서 선우씨를 1순위로 생각했고, 운이 좋게도 선우씨 역시 시나리오를 좋게 봐서 만나게 됐다. 선우씨는 시나리오 전체를 보고, 앞뒤 신을 어떻게 찍었는지 고려하면서 연기 톤을 맞춰줬다. 감독에게는 한 명의 연출부가 더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 유진의 모델이 된 우리 이모도 직접 만나보고 공부를 하더라. 단순히 장애를 가진 인물이 아닌, 그 사람의 뜨거운 면을 보여주기 위해 늘 고민했다. 물리적으로 실제로 몸을 움직이지 않아야 해서 제약이 많았을 거다. 나중에 들어보니 근육들을 다 제어하느라 실제로 몸에 문제가 와서 촬영 마치고 2~3개월간 재활을 했다고 하더라. 안타까웠다.
-기훈 역할에는 코미디언 김기리가 맡았다.
▶내가 선입견이 없다. 김기리씨가 코미디언으로 각인이 됐으면 캐스팅을 고민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고, 오디션 영상 중에서도 항상 순위권에 있었다. 그러다 만났는데 기훈이 같았다. 기훈은 꿈을 잃어버린 친구이고 공백기가 있는데, 김기리 역시 한동안 개그맨으로 일을 하다가 공백기가 있었고 그사이에 배우로서 꿈을 키웠더라. 기리씨가 가진 코미디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서 쓰는 것만 주로 해와서 정극 연기는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번 영화에 캐스팅된 게 기뻤던 것 같다. GV에서 얘기하는데 캐스팅된 날 울었다고 하더라. 자기가 정극 연기에 캐스팅될지 항상 물음표가 있었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연기도 잘했고, 태도가 너무 좋고 좋은 사람인 걸 항상 느낀다.
-영화를 보면 영미와 유진 역시 사랑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따로 의도한 건 아니었다. 모든 관계는 친밀감이 주는 일종의 애정도 있지만 약간의 집착성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가 이 사람들을 약자이고, 모자람이 있는 사람이라고 카테고리 지을지언정, 그들 스스로는 당당하고 자격지심이 없는 사람들이지 않나. 영미와 유진은 본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상대방의 진가를) 발견하지만 어떤 이들은 발견하지 못한다. 영미와 유진은 서로 발견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만났으니 서로에 대한 애정도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서로 촌스러운 줄 알았는데 되게 괜찮은 사람이네, 혹은 각박해 보이는 사람인데 따뜻하네, 이렇게 발견해 가니까 어쩔 수 없이 애정이 드러나는 거라 생각한다.
-'69세'와 '세기말의 사랑'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집중한 영화인데 이유가 있나. 차기작 계획도 어떨지 궁금하다.
▶미디어 속 인물들에 장애인도 있었고 소외된 인물도 많이 등장했지만 불만이 있었다. 보통 장애 자체, 성폭력 피해 자체가 캐릭터가 되는 경우가 많더라. 하지만 그런 건 그 사람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식일 뿐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생각해서 새로운 타입을 다루고 싶었다. 실제 나도 그렇고, 주변에 성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꽤 있지 않나. 그래서 남 일 같지 않아서 '69세'를 쓸 수 있었고, '세기말의 사랑'도 친척이 유진과 같은 인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꼭 사회적인 약자를 다루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을 보여줄 때 기존에 보여주지 않은 다른 각도로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