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영화를 보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영화 '리턴 투 서울'(감독 데이비 추)의 주연 배우 박지민(35)이 말했다. 전문적인 배우가 아니었기에 커다란 스크린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낯선 경험이었다.
"칸 영화제의 스크린이 너무 커요. 제 얼굴이 10m 정도 높이의 스크린에 나오니 괴로웠어요.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자기 연기가 어떻게 느껴졌느냐'고요. 아직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답하게 돼요.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 목소리도 행동도 보면서 '내가 저랬다고?' 싶었어요."
오는 3일 개봉하는 '리턴 투 서울'은 우연히 자신이 태어난 서울에 오게 된 스물 다섯 살 프레디(박지민 분)가 친부모를 찾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담은 작품이다. 프랑스 영화계를 이끌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데이비 추가 연출한 이 영화는 2022년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섹션에 공식 초청을 받았다. 그 뿐 아니라 박지민은 2022년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비현실적이에요. 내가? 내 연기가? 물론 열심히는 했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진심을 다 담아서 한 일이거든요. 비현실적이지만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리턴 투 서울'은 박지민의 데뷔작이다. 사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이전에는 전혀 배우의 길에 뜻이 없었다. 파리에서 비주얼아티스트로 활동해 온 그는 작가로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왔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의 소개로 데이비 추 감독을 만나게 됐고,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안까지 받게 됐다.
"처음에는 전혀 출연 마음이 없었고, 출연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도 안 갖고 있었어요. 그냥 호기심으로 만났어요. 어떤 외국 감독이 한국에 대해서 영화를 만드는데 한국에서 촬영하고 한국의 중요한 주제, 민감한 주제일 수 있는 걸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요. 같이 예술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호기심으로 갔을 뿐이었죠. 친구를 만나 수다 떠는 것처럼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니 메일이 와 있었어요. 카메라 테스트를 해보지 않겠냐고요."
첫번째 카메라 테스트를 할 때조차 박지민은 "이거 뭐야? 절대로 안 해"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상상해본 적도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국 프레디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데이비 추 감독을 소개해준 친구가 사실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프랑스로 입양된 친구였어요. 그 친구가 하루는 저에게 그랬어요. '이 영화를 네가 해주면 우리들에게 중요하고 고마운 일일 것 같다'고요. 그런 이야기에 너무 감동을 받았고 맞는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국적이 불투명한 영화이긴 하지만 메인 프로덕션은 프랑스에요. 프랑스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배우 중 알만한 배우는 딱 한 명 밖에 없고 한국계 배우는 한 명도 없거든요. 아시아인들은 완전 투명인간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예스' 했어요. 프랑스 영화에서 아시아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저에게는 너무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었거든요."
'리턴 투 서울' 속 프레디는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 캐릭터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이 인물은 때때로 거칠고 과격한 면을 보여주며 하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속에서 자기파괴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순종적이고 관조적일 것이라는 동양여성에 대한 선입견에 정면 배치되는 설정이다. 프레디가 지금의 프레디로 완성될 수 있었던 데는 박지민의 공이 컸다.
"데이비 추에게 고쳐줬으면 하는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얘기했었어요. '매일 게이즈'(male gaze,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해 보는 것)가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네 시나리오에 매일 게이즈로 틀에 박힌 프레디의 모습이 많다, 이걸 고치지 않으면 출연을 못 하겠다' 했었어요."
예컨대,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프레디가 입는 의상이 그랬다. 방황하는 프레디를 보여주기 위해 시나리오에서 데이비 추 감독이 택한 의상은 짧은 원피스와 하이힐이었다. 지금 영화 속 프레디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당시 시나리오 속 프레디의 모습이 남자가 어떤 여성을 '섹슈얼라이즈드'(sexualized, 성적 매력을 부여하다) 해서 보는 모습이었어요. '매일 게이즈'로 보는 틀에 박힌 프레디의 모습을 바꿔야한다고 얘기해줬더니 데이비 추 감독이 '네 말이 맞다'며 함께 의상을 설정하는 작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했어요. 클리셰를 벗어나고 싶은 부분이 많아서 그런 부분들을 데이비와 얘기하고 거의 한 달 넘게 같이 작업했죠."
영화 속 프레디가 그랬듯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에서 살아온 박지민도 상충되는 두 개의 문화 속에서 혼란을 겪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박지민은 여덟 살 때 온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했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현재 박지민을 제외한 가족들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거주 중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민을 가서 모든 게 어려웠어요.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했었어요. 저는 제가 한국 사람도 아니고 프랑스 사람도 아니라고 느껴요. 한국에 오면 내가 100% 한국 사람이 아니라 느끼고, 프랑스에서도 인생의 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살았는데도 프랑스인이라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방인이에요.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가끔 그런 말을 하는 프랑스인 친구들이 있어요. '너 프랑스인이잖아.'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프랑스 이민자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는 거죠."
박지민은 데뷔작을 통해 현지 매체에서 "엄청난 배우의 등장" "아름답고 유일무이한 여성의 모습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날것처럼 펄떡이는 박지민" 등의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배우로 어쩌면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연 것인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 '내가 뭔데 감히 배우를 해' '내가 뭔데 나대'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보면 제가 미술 작업을 할 때처럼 모든 것을 다 쏟아붓거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네가 그 정도로 할 수 있어? 할 수 없으면 안돼, 네가 뭔데' 스스로에게 말하고는 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솔직하게 돌아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사실은 연기하면서 느낀 쾌락이 너무 컸었다는 걸 알았어요. 즐거움과 행복함…그런 것들이 (미술) 작업할 때와 비슷했죠. 묘하고 열정적인 무엇인가? 그걸 제가 '네가 뭔데' 하는 마음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얼마 전에 (배우와 작가로) 투잡을 뛰자, 결정을 내렸어요."
'투잡'의 마음을 먹고 난 후 박지민은 몇 가지 제안이 들어온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리턴 투 서울'은 박지민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특히 영화를 본 입양인 친구가 해 준 한 마디는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던 애초의 선택이 얼마나 의미있었던 일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친구가 엄청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딱 그런 소리를 했었어요. 그 얘기가 다 한 것 같아요. '내 인생을 본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영화를 보신 모든 입양인 분들이 우리에게 영화 상영이 끝나고 와서 하신 말씀이 '내 인생을 본 거 같았다'는 거였어요. 이 영화를 해줘서 고맙다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해줘서 감동적이었죠. 너무 의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