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서연 기자 = "나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를 각하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히, 나는 정말로 기분이 상했습니다."
지난 2019년 6월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의 '깜짝 회동'이 열린 지 약 한 달 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이같이 토로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을 한 자신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것도 북한에 주지 않아 자신을 바보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총비서는 트럼프 대통령을 실망하게 할 일은 할 계획은 없다면서도 몇 달 전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베트남) 하노이" 때와는 상황이 달라져 북한은 이제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며 미국이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올 것도 기대했다.
25일 전·현직 주미 특파원 모임 한미클럽에 따르면 이달 발행한 외교안보 전문계간지 '한미저널 10호'에 김 총비서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18년 4월부터 2019년 8월까지 주고받은 친서 27통 내용이 공개됐다. 북미가 사상 첫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한 이후부터 빈손으로 끝난 하노이 제2차 정상회담, 북미가 마지막으로 공개 실무협상을 하기 전까지를 두루 아우르는 기간이다.
공개된 친서 내용을 보면 김 총비서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북핵 협상을 타결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 중 시기상 마지막인 2019년 8월5일자 서한에선 그간의 상황에 '격노'한 심경과 실망감을 솔직하게 쏟아냈다.
김 총비서 본인이 '편지가 길어졌다'고 언급할 정도로 장문인 이 서한에서 그는 자신이 원했던 바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미국에 대한 실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2019년엔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다가 6월30일엔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등 국면 전환이 반복됐다.
특히 판문점 3자 회동은 방한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김 총비서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뒤 김 총비서가 화답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두 사람은 남북미 회동 뒤 따로 1시간 가량 대화를 나눴고, 비핵화 실무협상 재개를 선언했다.
김 총비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시 만남을 떠올리며 "진정으로 얼마나 대단한 순간이었는지 스스로 놀라게 된다. (중략)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30일 전 우리 양국 전문가들이 수 주 이내 마주 앉아 각하와 내가 미래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논의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면서도 "그런데, 현 상황은 그 당시와 달라져 있다"고 지적했다.
김 총비서는 '중요한 문제를 계속 논의하게 될 실무급 양자 협상'을 앞두고 '취소 또는 연기'되리라 생각했던 "도발적인 연합 군사훈련"이 진행됐다고 날을 세우기도 했다.
김 총비서는 "우리가 매우 중요한 회담을 내다보고 있는 시점에, (미군이) 우리가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전쟁 연습'을 실시하는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나와 내 인민들이 당신의, 그리고 한국 당국의 결정과 행동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며 한미가 '골칫거리'로 여기는 핵과 미사일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북한의 안전을 위협하는 한미의 군사적 행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 총비서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주고받은 다른 친서에서 그를 깍듯이 '각하'라고 부르며 불만을 드러내기보다 미사여구를 통해 비위를 맞추는 데 치중했던 것과 사뭇 달라진 태도가 엿보이는 표현이다.
그는 '더 이상 북한의 핵실험도, 미사일 시험발사도 없으리라'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북한의 억류자 석방·송환 및 유해 송환을 거론했던 점도 친서에 적었다.
김 총비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우리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호응적·실용적으로, 현 단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을 했다"며 "하지만, 각하께서 해준 것은 무엇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김 총비서는 "나는 우리가 만난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며 좌절에 가까운 실망감도 토로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될 때마다 대대적으로 이를 내부에 알리며 인민들에게 '다가올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던 과거 행보를 후회하는 듯한 모습도 엿보인다.
그는 "어떠한 조치들이 완화되었다든가 내 국가의 대외 환경이 개선되기라도 했는가? 군사훈련이 중단되었는가"라며 "미국이 이를 압박과 대화를 통한 대북정책의 성공을 자평한다면 큰 실수일 것"이라고 반발했다.
김 총비서는 "각하(트럼프)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자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김 총비서는 서한에서 지금은 북미가 판문점 회담(2019년 6월30일)에서 약속했던 '실무급 대화'가 이뤄질 시점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 내 분위기도 좋지 않으며, 현시점에서 실무급 대화를 밀고 나간다면 외부 세계는 물론 국내적으로도 우리 수뇌부를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라며 "그렇게 강력히 중단을 요청했던 미국과 한국의 '전쟁 연습'"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실무급 대화가 가능하겠냐고 솔직한 이유를 밝혔다.
아울러 그는 실무급 대화가 열려도 "내가 간절히 원했던 제재 완화 문제에 대한 것도 아닐 것이며, 정상회담의 장소에 대한 것도 아닐 것"이라며 "불과 몇 달 전 내가 더 나은 삶의 시작을 앞당기려는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하노이 때와 유사한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고, 서두를 이유가 없다"라고 더 이상 비핵화 협상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김 총비서의 이 서한이 전달된 시점은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고, 북한은 '연말 시한'을 제시하면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압박하던 때다. 그는 서한에서 "연말까지 약 5개월 정도가 남아 있다. 좋은 합의를 도출하는 데 있어, 이 5개월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길게 보일 수도, 짧게 보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거의 모든 속내를 털어놓은 이 서한이 전달되고 약 두 달 뒤인 2019년 10월5일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에서 북·미는 실무협상을 진행했다.
2019년 '연말 시한'을 넘긴 북한은 2020년 자력갱생으로 전환하고 대화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며 '김정은-트럼프'식 비핵화 협상은 완전히 결렬됐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