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10월 11일 일요일 오전 10시. 개천절부터 한글날까지 이어졌던 기나긴 '징검다리 연휴'가 마침내 끝난 주말 아침이다.
거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힌 40대 직장인 K씨 부부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며칠 뒤 다가올 신용카드 결제 예정 금액이 붉은색 숫자로 떠 있다.
"여보, 우리 이번 달 진짜 마이너스야. 추석 때 나간 돈도 아직 안 메워졌는데, 이번 연휴에 애들 쉰다고 쓴 돈 합치니까 카드값이 평소 두 배가 넘네"
아내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K씨는 마른세수를 하며 대답했다.
"차라리 그냥 평일처럼 출근하는 게 돈 버는 거였어. 노는 날이 많으니까 숨만 쉬어도 돈이 줄줄 새네"
월 합산 소득 800만 원. 남부럽지 않게 버는 맞벌이 부부지만, 9월과 10월로 이어진 '가을 연휴 연타'를 맞고 난 이들의 통장은 이미 박살이 나 있었다.
◇ 추석 150만 원, 징검다리 100만 원… 쉴 틈 없이 터진 '청구서 폭탄'
이번 가을 3040 맞벌이 부부들의 지갑을 박살 낸 것은 단연 '연쇄 지출'이다. 불과 3주 전, 추석 명절을 치르며 양가 부모님 용돈과 차례비, 귀성길 주유비 등으로 150만 원을 훌쩍 넘게 썼다. 보통 명절이 지나면 한두 달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적자를 메워야 한다.
하지만 올해 10월은 잔혹했다. 개천절(3일), 대체공휴일(5일), 그리고 한글날(9일)까지 이어지는 황금연휴 구간에 학교와 유치원이 '재량휴업일'을 선언하며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명절 비용으로 이미 출혈이 컸던 K씨 부부지만, 출근을 위해 하루 15만 원짜리 긴급 돌봄 시터를 부르거나 단기 학원 특강에 아이를 보내야 했다.
여기에 집에 있는 아이들 삼시 세끼 식비와 간식비, 미안한 마음에 주말 하루 다녀온 근교 나들이 비용까지 합치니 10월 첫째 주에만 또다시 100만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휴일이 길어서 좋겠다"는 미혼 동료들의 덕담은, 부모들에게는 곧 '지출 명세서가 길어진다'의 동의어였을 뿐이다.
◇ 통계와 데이터가 증명하는 '휴일의 자본주의'
이는 K씨 부부만의 과소비가 아니다. 지극히 객관적인 통계가 증명하는 맞벌이 가구의 구조적 아이러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가계동향조사 및 주요 카드사들의 빅데이터 소비 트렌드를 종합해 보면, 명절이 끼어있거나 공휴일이 유독 많은 달의 3040 가구 소비지출은 평달 대비 최소 20%에서 많게는 30% 이상 급증한다.
특히 씀씀이가 가장 크게 뛰는 항목은 외식·배달비, 교통비, 그리고 돌봄을 위한 교육비(학원 특강 등)다. 외벌이 가구는 부모 중 한 명이 아이를 돌보며 지출을 방어할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맞벌이 가구는 그 시간의 공백을 오롯이 '자본'으로 막아내야 한다. 즉, 대한민국에서 맞벌이 부부에게 휴일이란 국가가 보장해 준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사비(자본)를 들여 메워야 하는 '구조적 공백'에 가깝다.
◇ "밥 해 먹을 힘도 없다"… 방전된 체력이 부른 보상 소비
더욱 뼈아픈 것은 지갑뿐만 아니라 체력마저 완전히 방전되었다는 점이다. 명절 연휴 내내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을 겪었고, 10월 징검다리 연휴에는 아이들 돌봄 공백을 메우느라 동동거렸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 3040 부부들의 소비 패턴이 전형적인 '생존형 소비'와 '보상 소비'의 결합이라고 진단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 등 소비자 행동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극심한 시간 빈곤과 체력 고갈에 시달리는 맞벌이 가구는 방전된 에너지를 복구하기 위해 비싼 배달 음식이나 홧김 비용(스트레스 해소용 지출)을 주저 없이 결제하게 된다.
실제로 연휴가 다 끝난 오늘 같은 일요일, 냉장고 파먹기를 하며 식비를 아끼겠다는 다짐은 무너지고 "너무 힘들었으니 오늘 점심은 시켜 먹자"며 배달 앱을 켜는 것이 이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 "우린 대체 누굴 위해 일하나"… 가짜 소득의 씁쓸한 현타
"이럴 거면 우리 왜 맞벌이 해? 버는 족족 다 나가고 남는 게 없잖아."
이번 주 날아올 카드 명세서를 덮으며 아내가 뱉은 자조 섞인 한마디는, 2026년 가을을 통과하고 있는 3040 맞벌이 부부 모두의 아픈 곳을 찌른다.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 '맞벌이'라는 풀악셀을 밟고 있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번 돈은 명절에 효도라는 이름으로, 연휴엔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방전된 체력을 링거와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비용으로 순식간에 휘발된다. 이른바 온전한 내 돈이 아닌 '가짜 소득'의 굴레다.
달력에 붉은 글씨가 많을수록 지갑은 더 얇아지고 한숨은 깊어지는 잔혹한 아이러니. 10월 11일 일요일 아침, 황금연휴가 휩쓸고 지나간 텅 빈 거실에서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다음 달에도 멈출 수 없는 쳇바퀴를 굴리기 위해 다시 구두 끈을 묶고 있다.
[email protected] 전상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