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소리 듣다, 퇴직하니 그냥 아저씨, 이력서 쓰는데.."

입력 2026.09.13 06:00수정 2026.09.13 08:42
[퇴직 뒤 다시 쓰는 이력서, 광화문의 중년들]
"요즘 승진 관심 없어요... 노후에도 먹고살 자격증 얘기 뿐"
대출이자에 얘들 한창 돈 들어갈 나이 '50'에 다시 구직자로
"부장님 소리 듣다, 퇴직하니 그냥 아저씨, 이력서 쓰는데.."
지난 11일 오전 서울시청 도서관 내·외부 인근에서 중장년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한승곤 기자
50대 직장인은 회사를 나온 뒤에도 곧바로 다음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 해온 직무와 비슷한 일을 구하기 어렵고, 임금 조건도 이전 수준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기자가 만난 중장년들의 말을 토대로 고용지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직 불안과 재취업 현장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회사 안에서는 부장이고 팀장이었는데, 밖으로 나오니 그냥 나이 많은 지원자가 됐습니다."

11일 오전 서울시청 앞 서울도서관 인근에서 만난 A씨(50대)는 휴대전화로 채용 공고를 확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경력을 다 쓰면 나이 많다고 안 뽑을 것 같고, 빼고 쓰면 내가 뭘 했는지 설명이 안 된다"며 "이력서 쓰는 것부터 막힌다"고 털어놨다.

이날 서울도서관 내부는 열람실과 자료실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있어 인터뷰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기자는 이날 도서관 주변과 인근 보행로, 광화문 인근에서 중장년들을 만나 퇴직 이후 구직 과정과 재직 중 느끼는 실직 불안을 들었다.

A씨는 지난해 말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나왔다. 처음에는 두세 달 쉬며 다음 회사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면접까지 가는 일은 드물었다. A씨는 "퇴직금이 있으니 버티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달 생활비가 빠져나가는 속도가 다르다"며 "아이 등록금과 대출 이자가 같이 나가는 집에서 50대 가장의 실직은 가족 전체 생활이 바뀌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재직 중장년들도 실직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직장인 B씨(52)는 "회사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새 프로젝트에서 50대 이름이 빠지는 일이 늘었다"며 "내 이름이 다음 희망퇴직 명단에 들어갈까 봐 주말에도 채용 공고를 확인한다"고 했다.

여기에 직장인 C씨(54)도 "임금피크제와 희망퇴직 이야기가 같이 나오면 회사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며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같은 조건으로 다시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게 가장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서는 아직 회사 다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회사 안에서는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숫자로는 보이지 않는 퇴직 불안

"부장님 소리 듣다, 퇴직하니 그냥 아저씨, 이력서 쓰는데.."
사진=연합뉴스

전체 고용지표만 놓고 보면 중장년 고용 사정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국가데이터처의 '2026년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는 2915만1000명으로 1년 전보다 18만4000명 늘었다. 15~64세 고용률은 70.4%로 전년 동월보다 0.5%포인트 올랐고, 실업률은 2.0%로 전년 동월과 같았다. 연령별 고용률도 40대와 50대에서 상승했다. 고용노동부가 8월 고용동향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40대 고용률은 80.7%로 전년 동월보다 0.8%포인트 올랐다. 50대 고용률은 78.8%로 1.3%포인트 상승했다.

하지만 중장년이 현장에서 말하는 불안은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주된 일자리에서 나온 뒤 같은 직무와 임금, 고용 형태로 다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경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A씨는 "구직 상담을 가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듣는다"며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 임금을 줄이라는 건지, 직무를 바꾸라는 건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잊으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평균 53세에 떠나는 일자리


중장년 고용 문제는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시기와 이어져 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6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55~79세 취업 경험자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사람의 비중은 69.5%였다. 이들이 그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 연령은 53.0세였다.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이유는 사업 부진·조업 중단·휴폐업이 24.9%로 가장 많았다. 건강 문제는 22.1%, 가족 돌봄은 15.2%였다. 개인 선택만으로 주된 일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 사정과 건강, 돌봄 부담이 함께 작용하는 구조다. 퇴직 이후에도 상당수는 일을 계속 원한다. 같은 조사에서 55~79세 가운데 장래 근로를 희망한 사람은 69.2%, 1178만2000명이었다. 이들이 희망하는 근로 연령은 평균 73.6세였다. 지난 1년간 연금 수령자 비중은 52.7%였고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88만원이었다.

A씨도 퇴직 뒤 쉬고 싶다는 생각보다 다시 일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 컸다고 했다. 그는 "처음 한 달은 아침에 출근하지 않는 게 어색했고, 석 달이 지나니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느낌이 왔다"며 "명함이 없어지는 것보다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고 말했다.

다시 정규직으로 가기 어려운 시장

"부장님 소리 듣다, 퇴직하니 그냥 아저씨, 이력서 쓰는데.."
사진=연합뉴스

한국개발연구원은 중장년 고용 불안의 원인으로 정규직 노동수요 부족을 지적했다. 연구자료 '중장년층 고용불안정성 극복을 위한 노동시장 기능 회복 방안'은 중년 이후 고용 불안정성이 커지는 표면적 이유로 비정규직 비중 증가를 설명했다.

2022년 기준 55~64세 임금근로자 중 임시고용 근로자 비중은 남자 33.2%, 여자 35.9%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남자 8.2%, 여자 9.0%였다. 한국의 중장년층 임시고용 비중은 OECD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연구원은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중장년층 근로자에 대한 정규직 노동수요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다. 어떤 이유로든 정규직 일자리에서 이탈하면 다시 정규직으로 재취업하기 어렵고, 그 결과 비정규직 비중이 늘어난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정규직 임금의 경직성과 과도한 연공서열형 임금구조가 기업의 조기퇴직 유인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직무도 함께 바뀐다. 연구원의 '직무 분석을 통해 살펴본 중장년 노동시장의 현황과 개선 방안'은 20~75세 남성 취업자를 대상으로 직무 구성을 분석했다. 이 자료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분석·사회 직무보다 반복·신체 직무를 주로 수행하는 일자리에 종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50대 이후 분석 직무와 사회 직무 성향이 급격히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중장년 구직자에게 직무 단절은 임금 하락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무직으로 오래 일했던 사람이 퇴직 후 시설관리, 경비, 배송, 단기 행정 보조처럼 이전 경력과 직접 맞지 않는 일자리로 옮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A씨는 "재취업 교육에서 자격증을 따라는 말을 듣고 시설관리 쪽도 알아봤다"며 "그 일을 낮게 보는 게 아니라, 20년 동안 해온 일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 힘들었다"고 했다.

"회식 자리에서는 '인생 2막' 위한 자격증 이야기"

"부장님 소리 듣다, 퇴직하니 그냥 아저씨, 이력서 쓰는데.."
AI로 생성한 인포그래픽

재직 중인 중장년들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퇴직 뒤 할 일을 알아보고 있었다.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B씨는 "요즘은 회식 자리에서도 자격증 이야기가 나온다"며 "누가 전기기능사를 준비한다, 누가 요양보호사 과정을 알아본다 이런 말을 한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승진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은 나간 뒤 뭘 할지가 대화 주제가 됐다"고 말했다.

C씨는 불안을 가족에게 쉽게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아이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퇴직 이후 월급이 얼마로 줄어들지 계산하고 있다"며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집 분위기부터 달라질까 봐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중장년 실직은 한 사람의 경력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50대는 자녀 교육비와 부모 부양, 주거비 부담이 함께 있는 시기다. 직장을 잃으면 근로소득이 끊기는 데 그치지 않고 국민연금 수급 전까지 소득 공백도 생긴다. 재취업이 늦어지면 퇴직금도 생활비와 대출 상환에 금세 줄어든다.

중장년 위한 '좋은 일자리' 필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중장년 재취업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중장년 경력지원제'를 2000명 규모로 추진하고 있다. 이 제도는 사무직 등 주된 업무에서 퇴직한 뒤 경력 전환을 준비하는 50대 중장년에게 일경험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참여자에게는 월 최대 150만원의 참여수당이 지급된다.

서울시는 40세 이상을 대상으로 중장년 가치동행일자리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사업 규모는 6000개로 안내됐다. 돌봄, 안전, 환경 등 공공 분야에서 활동하는 방식이며 월 57시간 기준 58만8240원의 활동비가 지급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도 경력 전환을 준비하는 중장년을 대상으로 1대1 취업 상담과 이력서 코칭, 취업 알선, 취업 뒤 적응 지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중장년취업사관학교를 통해 취업 상담, 훈련, 일자리 매칭, 사후관리를 한 번에 지원하는 방식도 추진하고 있다.

전문가는 중장년 고용 불안을 줄이려면 개인의 재취업 교육만으로는 부족하고 노동시장 구조를 함께 손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 교육·노동혁신연구팀장은 KDI FOCUS '중장년층 고용 불안정성 극복을 위한 노동시장 기능 회복 방안'에서 "중장년층의 직무단절과 고용불안정성은 이들이 재취업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며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는 중장년층을 고용하는 비용을 과도하게 높여 이들의 조기퇴직을 유발하고, 재취업 시 일자리 질을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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