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미야케 쇼(三宅唱·41) 감독을 향한 평단의 평가는 대체로 일치했다. 미래 거장이 될 재목. 영화계에선 거장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미야케 감독을 향한 이런 상찬엔 거부 반응이 없었다. 그가 작품 외적인 요소 덕분에 혹은 저간의 사정이 작용해서 미디어와 평단에 의해 추어올려진 그런 연출가 또는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야케 감독은 오직 작품으로 증명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청춘으로,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의 상실로, '새벽의 모든'의 치유로. 그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넉넉히 인정 받았다. 그리고 오는 10일 '여행과 나날'로 다시 한 번 한국 관객을 찾는다.
딱 잘라 말하고 싶다. '여행과 나날'은 걸작이다. 영화계에선 걸작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상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 흡사 이 영화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보여준다. 말을 하지 않고도 말을 건다. 비워서 채운다. 지루해서 흥미롭다. 이 작품은 영화적 체험이라는 건 요란하게 쏟아부어 혼을 쏙 빼놓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 이들에게 조용히 덜어내서 관조하는 식으로도 충분하다고 깨우친다. 그리고 '여행과 나날'은 일단 미야케 감독의 최고작이겠지만 그의 영화 세계가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일본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래서 이 작품을 본 뒤 무려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를 소환했다.
'여행과 나날'은 시나리오 작가 '이'(심은경)가 쓴 극본으로 만들어진 영화 한 편과 각본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여행을 간 '이'가 시골 산에 있는 여관에 묵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일본 작가주의 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츠게 요시하루 작가가 1967년에 내놓은 '해변의 서경', 1968년에 발표한 '혼야라동의 벤상'이 원작이다. 미야케 감독은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작들에서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려 했다면 이번엔 바람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또 한 번 한국에서 새 영화를 선보인다. 기분이 어떤가.
"이전 작품을 선보일 때도 그랬지만 영화를 내놓는다는 건 자극적인 시간이다. 우선 한국에 또 갈 수 있다는 기대와 감동이 있다. 심은경 배우와 함께한 작업이기도 하니까. 이와 함께 긴장감도 있다. 한국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말씀했듯이 심은경 배우와 함께 작업했다. 원작 만화 주인공은 원래 중년 남성인데 나이와 성별을 모두 바꿨다. 어떻게 심은경 배우를 캐스팅하게 됐나.
"이 작품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뒤 주인공에 관해 오래 고민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번뜩이듯 심은경 배우가 내려왔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영화의 중요 테마 중 하나는 여행이다. 처음 가는 장소에서 평생 안 만날 것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놀라움이 잘 표현돼야 했다. 심은경 배우가 이 부분을 제대로 표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가진 배우로서 자질과 순수함을 믿었다."
-심은경 배우와 언제 처음 만났나.
"스치듯이 지나치면서 처음 봤다. 그 이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을 선보일 때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무대에 올라 알게 됐다."
-함께 일해보니 심은경은 어떤 배우였나.
"프로페셔널이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연기할 땐 아름답고, 예능을 할 땐 재밌지 않나. 두 가지를 다 가진 배우다. 그래서 특별한 매력이 있다."
-츠게 요시하루 작가가 1967년에 내놓은 '해변의 서경', 1968년에 발표한 '혼야라동의 벤상'이 원작이다. 이 작품들을 어떻게 접하게 됐고, 이 두 개 만화를 어떻게 한 편의 영화에 하나의 스토리로 담게 됐나.
"요시하루 작가의 만화를 본 건 대학생 때다. 그의 작품은 그때까지 내가 봐온 만화와 전혀 달랐다. 놀라웠고 당황스러웠다.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만화들을 하나로 묶게 된 건 아주 심플한 아이디어였다. 하나는 여름이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겨울이 배경이라서 이 두 작품을 한 편의 영화에 담으면 보는 분들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두 개 스토리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재밌게 표핸해보고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
"대사 중에 '살아 있다는 실감'이라는 말이 있다. 이게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워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놀라움이나 신선함을 느끼다가도 그 감정이 계속 되다 보면 그것조차 지루해지지 않나. 타성에 젖는다고 해야 할까. 그럴 때 우린 살아 있다는 느낌을 더 받고 싶어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 영화는 실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놀라움을 주고 싶다."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
"음…영화를 처음 볼 때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영화를 계속 보다 보면 그 놀라움이라는 게 사라지지 않나."
-촬영할 때 가장 중점을 둔 건 무엇이었나.
"이전 영화들에서 빛과 그림자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엔 바람을 찍고 싶었다. 배우들에게도 바람을 느껴달라고 했다. 연기를 하다가 바람이 불면 바람에 반응해달라고 한 거다. 배우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 전체를 바람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촬영지를 물색할 때도 지형상 바람이 잘 부는 곳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촬영이었다. 바람이 불 때 '액션'을 하게 되면 이미 늦지 않겠나.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있다가 바람이 불 것 같은 타이밍에 '액션'을 줬다.(웃음)"
-이 영화 촬영 중 인상적인 건 여름과 겨울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여름을 덥게, 겨울을 춥게 그리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여름은 서늘하게, 겨울은 포근하게 그린 듯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편집을 하다 보니까 딱 그런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이런 건 어떤 실험 같달까. 맥주와 콜라를 섞으면 어떤 맛일까, 아 이런 맛이구나, 라고 알게 하는 것이랄까."
-이 영화는 당신 전작들과 비교할 때 가장 시적이라는 인상을 줬다.
"음…사실 스토리가 없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스토리 전개가 없지 않으면서 시와 같은 느낌이 나길 바랐다. 극 중 그런 말이 나오지 않나. '여행이라는 건 말과 멀어지는 것이다.' 말을 스토리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무언가와 떨어져서 새로운 걸 시작할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 그걸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다."
-앞으로 당신의 영화는 점점 더 시적인 것이 될 거라고 봐도 될까.
"그런 기대를 배신해서 놀라움을 주고 싶다.(웃음) 물론 이번 작품처럼 또 한 번 시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알 수 없다."
-초반 30분 가량 대사가 거의 없다. 관객 입장에선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 않나. 이 부분에선 어떤 고민이 있었나.
"어려운 질문이다. 지루하다는 것, 그게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지루하기 때문에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스릴감이 생기지 않을까. 자루함과 스릴감 그 섬세한 경계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영화관이 필요했다. 만약 지금 인터뷰 하고 있는 이 장소에서 우리가 30분 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참 지루할 것이다. 분명히 휴대폰을 꺼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영화관이라면 오히려 그 시간이 기대감으로 바뀌고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본 거다."
-극장에 관한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최근 한국에선 영화 관객이 줄어들고 있다. 올해는 작년보다 관객수가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적인 흐름 역시 그렇다.
"난 평소에 휴대폰이나 TV로 영상 보는 걸 안 한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나조차도 영화관에선 집중해서 볼 수 있다. 영화관은 바로 그 집중력을 준다. 나 같은 사람에겐 영화관이 필요하다. 영상의 크기라는 건 중요한 문제다. 공룡 영화를 휴대폰으로 보면 그 작품에 대한 리스펙트가 생길까. 그렇지 않다. 영화관에서 봐야 공룡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 그리고 그 공포는 경이로움으로 그리고 리스펙트로 바뀐다. 난 영화로 그걸 체험했다. 글쎄,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기 위해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영화관에 관해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게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영화관에서 볼 때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 역시 기사로 힘을 보태줘야 한다. 그런 힘들이 쌓이다 보면 작은 변화가 일어날 거다."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하스미 시게히코 등 평론가들도 이 작품을 극찬했다. 당신을 일본 영화의 차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난해 '새벽의 모든'으로 인터뷰를 할 땐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생각엔 변함이 없나.
"로카르노에서 상을 받은 것이나 존경하는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가 좋은 평가를 해준 것 모두 감사한 일이다. 이번 영화까지 연달아 세 편을 같은 스태프와 만들었다. 아마도 현재 평가는 그동안 일이 축적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더 성장해서 이런 상까지 받았다는 기쁨이 있다. 다만 상을 받거나 좋은 평가가 있었다고 해서 내 아이디어가 많아지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불안한다. 다만 그런 긴장감을 즐기면서 다양한 도전을 하고 싶다."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고지,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 등과 함께 일본영화 뉴제너레이션으로 불린다. 일본영화 부흥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들과 교류하고 있다. 가장 많이 교류하는 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다. 다만 각자 생각이 다르고, 다른 베이스에서 일하고 있다. 음…그리고 오해하지 않고 들어주셨으면 한다. 일본인 감독이라는 것, 아시아 감독이라는 건 해외에 나갔을 때나 체감하게 된다. 일본 안에 있을 땐 내가 일본인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일본이라는 곳으로 한정시켜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10대 땐 외국영화를 많이 봤다. 그땐 일본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른 나라 영화를 보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게 됐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일본이라는 나라로 국한해 영화를 본다면 그것도 하나의 문제가 될 거라고 본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도전하고 싶다.
-목표 같은 게 있나.
"다음 영화를 준비 중이다. 이 영화를 좋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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