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K-컬처'는 이제 '글로벌 문화'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K-팝', 'K-드라마', 'K-예능', 'K-무비' 등은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뉴스1은 지구촌 전역에서 주목 받고 있는 'K-엔터테인먼트'의 주역들을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가 직접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는 [정덕현의 페르소나K] 코너를 마련, 독자들에게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합니다.
(서울=뉴스1)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요구한다. 글로벌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은 여러 다양한 문화의 층위들을, 그 경계를 넘나들며 소화해 낼 수 있는 인물이다. 최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이나, '패스트 라이브즈'에 이어 '머티리얼리스트'를 선보인 셀린 송 감독처럼 K-디아스포라로 불리며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한국계 이민자 출신 아티스트들은 단적인 사례다. 이들은 한때 이민자들이 겪는 국가, 언어, 문화의 정체성 사이에서 차별받기도 하고 혼돈의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 과정을 거쳐 서로 다른 문화들을 체화한 존재로서 글로벌 공감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됐다. 유태오(44)라는 배우가 서 있는 위치가 바로 그렇다. 파독 광부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 이민자였던 그는, 유럽과 러시아, 미국, 베트남, 태국 그리고 한국을 넘나드는 활동을 해왔다. 긴 무명 배우 시절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과정들이 자양분이 되어 '패스트 라이브즈' 같은 글로벌한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가 됐다. 인터뷰에서는 다양한 경계를 넘어온 그의 삶과, 이를 통해 축적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독보적인 연기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향후 K콘텐츠가 가야 할 길에 어떤 비전 또한 제시하고 있었다.
◇ '패스트 라이브즈', 경계인의 감수성
유태오는 글로벌 스타다. 해외에서 작품을 찍으면 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태어난 김에 음악일주'에서는 텍사스에 갔다가 알아보는 미국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들은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패스트 라이브즈'와 여기에 나온 유태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유태오에게 어떤 작품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저한테는 커리어에 있어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러니까 할리우드로 진출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죠. 근데 그건 결과고 과정으로 따지자면 제가 연기할 때 항상 캐릭터를 어떻게 하면 여운이 남을 수 있게 연기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하는데, 윤회와 인연 같은 불교철학을 진짜 믿고 마지막 대사를 쳐야 별다른 담담하게 관계를 마무리 짓는 주인공의 모습에 여운이 남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연기를 그래서 기술적인 차원보다는 처음으로 믿음 체계로 들어가서 했던 거라 제게도 연기하는 방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배운 건 캐릭터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고, 또 언제이고, 무엇을 하고, 왜 하는가 같은 5개의 답을 줘야 한다는 기술적인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감수성과 감정적인 믿음 체계로 들어가니 그런 숙제들이 다 끝났더라고요. 사실 '인연'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와 동양 철학 안에서는 흔하게 쓰는 그런 말이잖아요. 하지만 전 독일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스무 살까지 살았기 때문에 이 단어가 제게는 특별했어요. 저를 많이 바꿔주기도 했죠."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민자의 삶이 전생과 현생으로 나뉘어 보일 정도로 서로 다른 문화의 정체성을 살게 되는 경계인의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적인 문화적 배경과 정서도 갖고 있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살면서 생겨난 언어나 문화 같은 새로운 경험치들도 섞여 있어 독특한 정체성을 만든다. 유태오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독일에서 한국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고, 이후에도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그 문화권을 경험했다. 이런 경험들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인연'같은 말을 특별하게 하지 않았을까.
"맞는 말이에요. 이민자로서 느끼는 환경 속에서 조금은 다른 정체성을 느껴왔죠. 이질감일 수도 있지만 외로움일 수도 있고. 그런 걸 느낄 때가 많은데 모국으로 돌아오면 또 느껴지는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정체성 같은 것도 있어요. 그런데 배우 입장으로 봤을 때는 이런 면들이, 이 직업을 만나게 된 게 너무 고마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런 이질감을 통해서 느끼는 외로움이 사춘기 때는 반항심에서 나오는 분노나 화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외로움들이 특권으로 느껴져요.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감수성이 색깔이라면 저의 팔레트에 그 색깔들이 넓어지는 거죠. 배우로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재료들을 갖게 된 건 너무나 고마운 거죠."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캐나다로 이민 가서 이제는 나영이가 아니라 노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여주인공은 이렇게 얘기한다. "네가 좋아하는 나영이는 여기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너 앞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거는 아니야, 20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한국에서만 살아서 한국인의 정체성만 계속 갖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걸로 아는데 유태오처럼 여러 나라의 정체성을 경험한 분들은 다를 수 있을 터였다.
"근데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들어와 살게 되면 물론 언어와 문화는 비슷하지만, 달라진 정체성에 관한 경험을 할 거거든요. 다른 환경을 경험하고 나서 본래 자리로 돌아가면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시각은 똑같이 바라보는데 스스로는 변화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환경을 바꿔보는 건 그래서 사람을 좀 크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 농구선수 꿈꾸던 그가 배우의 길에 들어선 이유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오는 스무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살았지만, 사춘기 때는 시골에서 5년간 살면서 그곳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가 살던 도시는 서독 쪽인 쾰른으로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같은 여러 문화권에 가까이 있는 도시다.
"문화가 확실히 다르죠. 음식으로 얘기하자면 베를린에서는 이제 옛날 미군들이 많아서 감자튀김에 케첩 뿌린 커리 소스를(커리 부어스트에 들어가는) 만들었는데, 쾰른에서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서 감자튀김에 하얀색 소스 바이스를 넣어 달라고 해요. 그만큼 다른 문화를 갖고 있죠. 하지만 그곳의 한인사회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를 늘 접하곤 했어요. 어렸을 때는 한인 분들이 많이 사셨던 도시에서 살았는데 일요일은 한인 교회, 토요일은 한글학교를 다녔죠. 아마도 이건 세계적으로 다 비슷할 거예요. 미국에 가든 어딜 가든 그런 비슷한 경험들이 있었죠.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서 배우고, 8.15 행사 체육대회도 있고, 크리스마스 때는 아이들이 무대에 나가서 시나 노래를 부르고 사물놀이도 배우고 그랬죠."
당시 유태오의 꿈은 농구선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길거리 농구를 많이 했고, NBA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부상으로 꿈을 포기해야 했던 유태오는 1년 동안 새로운 경험을 위해 미국 뉴욕에 갔다가 그곳에서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학교에 가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영화 보는 거를 좋아해서 제가 좋아했던 영화나 감독들, 배우들을 조사하다 보니까 그런 학교가 있더라고요. 그 학교에 입학해 3개월 동안 다니면 나머지 9개월 학생 비자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3개월 하고 나머지는 알바하면서 재밌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첫 2주 만에 이것이 내가 원했던 길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연기를 시작했는데 운동선수로서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는 거예요. 운동도 무대에 서는 거잖아요. 사람들의 집중을 받고 어떤 기술을 해내면서 성공했을 때의 그런 감정이 떠올랐죠. 연기는 더 다양하게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는데, 2주 만에 제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 경험들이 많지 않았어요. 운동만 알고 숲속에서 혼자 놀고 친구들도 대부분 터프해서 혼자 영화만 좋아하고 가끔 시집이나 소설 같은 걸 몰래 읽고는 했는데 이제 연기를 하면서 뭔가 이렇게 딱 맞아떨어진 거죠."
유태오가 나온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학원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을 발전시켜 미국식 메소드 연기를 확립한 폴란드 출신 미국 이민자였던 리 스트라스버그의 메소드 연기를 가르치는 곳이다. 그가 얘기하는 정서기억법이란 인물이 처한 상황과 유사한 개인적 경험을 감각기억을 활용해 감정적으로 동화시키는 연기법이다. 유태오는 그 학원에서의 첫 연기 때 느꼈던 강렬했던 감정을 기억했다.
"거기서는 단계별로 기술을 시키거든요. 2주 차 때 선배들이 하는 걸 신인들이 이렇게 받쳐주는 기술을 하고 연습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저에게 플레이스 엑서사이즈(Place exercise) 즉, 공간기술을 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과거의 공간을 떠올리면서 보이고 들리고 하게 느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감정이 올라올라 오는 거에요. 저도 모르게 막 울고 콧물 흘리고 소리 지르고 하는 격렬한 감정이 터져 나왔어요. 선생님께서 어떤 트라우마를 주는 공간으로 가서 그것을 해소해 보라고 했던 거였거든요. 메소드 연기가 오해받는 것 중 하나가 감정을 따라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메소드는 절대 그런 게 아니고 과거에 느꼈던 상황을 오감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오감으로 느끼게 되면 감정이 저절로 나오게 되죠. 그때 선생님이 저보고 좀 소질이 있는 같다면서 마스터클래스로 오라고 했죠. 그래서 3주 차부터 그 선생님의 마스터 클래스를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 악기는 내 몸이고, 나는 좀 더 예민한 몸을 가졌다
사실 말이 쉽지, 누구나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연기 수업을 받은 지 2주 만에 마스터 클래스 선생님의 콜을 받을 정도로 오감으로 감정을 꺼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남다른 유태오만의 자질이 있었다.
"제가 갖고 있는 악기가 제 몸이고 제 몸이 일반인들보다 좀 더 예민했던 건 맞는 거 같아요. 또 운동선수 출신들은 시키는 대로 하거든요, 선생님이든 누구든 간에 코치님이 왕복 뛰어 하면 생각 없이 왕복 뛰거든요. 시키는 대로 하니까 어떤 부담 없이 감정적으로 그렇게 갈 수 있었어요. 운동을 한 것도 연기에는 너무 도움이 됐던 거죠. 운동을 해서인지 저는 사회적인 가면을 써서 감정을 숨기거나 하지는 않았었거든요. 보통은 에고가 감정을 억누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편하게 말도 못 하고 감정도 안 보여주는 사람이 있죠. 그런데 스튜디오에서 연기라는 공간은 그것이 다 보호망이 되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면 그걸 꺼내 보여줄 수 있죠."
하지만 연기는 감각을 동원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낸다고 해서 되는 문제는 아니다. 거기에는 캐릭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에 맞게 컨트롤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거와 저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계속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나리오에 그걸 맞춰야 하고 부적절하게 갑자기 감정이 터지면 안 되니까. 배우고 연습하고 그리고 이런 기술들을 통해 미리 리허설을 하고 어떤 감정 반응이 나오면 그걸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겠다 생각하죠. 그런 준비기간이 필요해요."
개인적으로 연기는 연기자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도 잘 살아가기 위해서 연기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표정이고 자신의 감정표현을 잘 못하는데 이건 언어를 배울 때 서구처럼 연기적 요소까지 포함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맞아요. 고등학교, 대학교 동아리 모임에 연기를 배우는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꼭 직업적으로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운동이 건강을 위해 필요하듯이 연기도 정신 건강을 위해 한번 접근하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 경계인으로서의 적당한 거리감과 균형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은 어려서 캐나다로 이민 간 경계인이다. 최근 글로벌 신드롬을 만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도 역시 한국계 캐나다인으로서 경계인이다. 최근 이처럼 경계인들이 내놓는 작품들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건 '국뽕'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소도 아닌 적절한 거리감과 균형을 가진 시선 때문이 아닐까. 유태오도 경계인으로서의 그 적절한 거리감과 균형을 갖춘 배우로서의 아우라가 엿보인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전형적인 한국남자 역할로 해성이 더 리얼하게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이 경계인의 시선이 가진 적절한 거리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제가 이 나이에 그런 작품을 한 것이, 저의 경험과 시대 변화가 딱 맞아떨어진 느낌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런 경계인으로서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로 캐스팅됐잖아요. 그렇게 전형적인 한국 남자들이 많은데 오디션 보고 나서 왜 나일까 이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전형적인 한국남자지만 과하지 않은 느낌. 그것이 유태오가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보여 주었던 해성의 모습이었다. 경계인으로서 살아오면서 저절로 체득하게 된 적절한 거리감이 준 장점이었겠지만, 그 실제 삶이 어찌 좋기만 했을까. 유태오는 스무 살 이후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또 한국으로 와서 살았고, 작품을 위해 러시아, 태국, 베트남 등등 다양한 이국을 경험했다. 특히 '레토'라는 작품을 보면 빅토르 최 연기를 하면서 러시아어로도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유태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유태오의 장점은 그런 이질감이 주는 불편함이나 낯섦에 대해 그리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소통의 문제가 좀 있었어요. 러시아가 그런 시스템이 잘 안 되어 있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더빙할 테니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 촬영 2주 앞두고 립싱크는 맞아야 되니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2주 만에 하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은 감독님의 책임이라고 생각해 전 그리 부담을 안 느꼈어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선생님 붙여달라 했죠. 사실 그때는 도전 의식도 있었어요. 리 스타라스버그가 메소드 연기를 스타니슬랍스키를 보고 현실적으로 개발한 거니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서 경쟁하고 배우면서 연기를 한다는 마음이 있었죠. 러시아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어로 소리 나는 대로 써보고 여기에 영어, 독어 같은 걸 다 붙여서 저만의 언어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소리를 만들고 그 의미를 영어로 번역해서 감정 해석도 시나리오에 써가면서 이를 반복해 연기를 한 거죠."
◇ 청년 빅토르 최에게서 유태오가 느낀 동질감
빅토르 최는 한국인들에게도 팬층이 존재하는 고려인 출신의 전설적인 러시아의 로커다. '레토'는 빅토르 최가 아직 무명이었던 시절을 다룬 작품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그 배역을 맡은 유태오가 글로벌한 존재감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된 걸까.
"오디션에 제가 주차장에서 카메라 설치해서 부른 자작곡을 보냈어요. 당시에는 제가 이 역할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근데 그걸 보내고 뽑힌 후 일주일 뒤에 모스크바로 와서 오디션을 보라고 했죠. 모스크바의 감독님 극단에 가서 서너 시간 동안 오디션을 본 것 같아요.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끝나고 나서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친구가 제가 못 알아듣는 러시아어로 그렇게 말했대요. 우리가 빅토르 최를 찾은 것 같다고."
빅토르 최는 고려인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반항했던 인물로서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아티스트다. 유태오는 어떤 마음으로 이 역할에 임했을까.
"오디션 볼 때도 많은 러시아인들이 아마도 그 멋있는 반항의 에너지를 갖고 있는 그 록스타의 모습을 많이 흉내 냈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 작품은 19살, 20살 거친 청춘의 빅토르 최의 이야기인데, 그 상황이 저하고 다를 게 없었어요. 저도 무명이었고 독일과 한국 사이에 살았기 때문에 오디션을 볼 때도 느꼈던 게 동양적인 감수성과 서양적인 감수성이 러시아에서 만나게 되는 뭔가 오묘하게 편안한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이방인 같은, 그 경계선에 있는 청춘 그리고 예술을 좋아하는 남자, 나 말고 누가 이거를 이해할까 싶었어요. 그런 감수성을 제가 그냥 감독님한테 설명한 거죠."
'레토'를 보면 빅토르 최는 무명인데 주눅 드는 법이 없다. 이미 유명한 록커인 마이크가 어떤 의견을 내도 자기가 한 게 더 나은 것 같다고 밀고 나가는 식이다. '레토'가 러시아어로 '여름'이란 뜻인데, 빅토르 최는 가진 게 없어도 청춘이 가진 열정이나 발산의 자신감이 넘쳐난다. 그건 당시의 유태오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무식하고 몰라서 당당한 게 있죠. 많은 분들이 책임질 일이 많아지니까 사는 데 고민도 많아진다고 하는데 저는 사실 조금 달라요. 나이 들어도 철이 안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호기심이 있으면 어떤 거든 해보는 사람이라 그런 건지, 어쩌면 제 환경과 제 직업이 그걸 허락해 줘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그리고 배우자도 아티스트다 보니까 적어도 남이 걷지 않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수 있는 그런 경험을 서로 밀어주기도 하고 응원해 주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만든 영화 '로그 인 벨지움'에서 얘기한 것처럼, 과거에 갇혀 있는 트라우마들 때문에 지금을 살지 못하고 미래의 고민과 뭔가 안 될 수도 있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하고 그러죠. 과거의 감정적인 그런 요소들을 떨쳐내고 그냥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쉬운 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묵묵히 버티다 보면 자기만의 타이밍이 오기 마련이죠. 1993년과 1994년도에 2년 연속 독일에서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홍수가 있었어요. 부모님들은 파산 신고를 해야 했었죠. 그때 열셋, 열넷의 나이였는데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어요. 부모님이 뭔가 좋은 미래를 위해 독일까지 와서 열심히 살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죠. 결국 우린 다 죽잖아요. 현재가 더 중요한 거죠."
◇ 여러 언어를 통해 갖게 된 다양한 감수성
유태오는 여러모로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점만 봐도 그렇다. 독일어에 영어 그리고 한국어는 기본이고 작품을 위해 단기적으로 러시아어 같은 다양한 언어들을 배웠다. 그의 다양한 언어 구사 능력과 이를 통한 다양한 문화의 체득은 연기에는 어떤 도움을 줄까.
"여러 언어를 하게 된 건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독일에서 자랐으니 독일어를 하게 된 거고,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데다, 한국사람이랑 결혼하고 말싸움에 지기 싫어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죠.(웃음) 특정 언어의 표현은 특유의 감수성이 담기는데요, 예를 들어 '싱겁다'는 표현은 음식 맛에 쓰지만 분위기나 사람을 설명할 때도 쓰잖아요. 거기에는 우리만 알 수 있는 감수성이 있죠. 근데 이 감수성을 다른 언어의 작품에서 썼을 때, 그 언어권의 사람들은 느껴보지 못했던 '싱거운'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는 있는데 콕 짚어 설명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때 연기가 재미있어지는 것 같아요. '페스트 라이브즈'에서도 제가 그런 식으로 여러 다국적인 문화의 감수성을 섞어 해성을 표현했는데 이게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컬러 팔레트죠. 짠맛 하면 소금 맛만 아는 분들에게, 간장으로 맛을 냈을 때 이게 뭐지 하는 그런 거죠."
유태오는 그가 경계인으로서 겪은 다른 문화의 다양한 감수성과 감각들을 섞어서 연기에도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그의 연기가 색달랐던 이유였다.
"우리나라 말에 '짜증 난다'는 표현이 있잖아요. 근데 짜증을 내는 감수성이 외국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단어가 없기 때문이죠. 귀찮다거나 화가 난다 같은 표현들이 있지 짜증 난다는 말은 없죠. 특히 '짜증'의 그 쌍지읒이 주는 그 느낌, 감수성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러한 특유의 감수성을 아는 게 사람을 굉장히 풍부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연기도 이러한 경험을 한 것 안에서 이렇게 재료들을 갖고 올 수 있는 거잖아요."
◇ 귀결점은 결국 작품 그리고 관객
유태오는 '패스트 라이브즈'로 주목받기 전 15년간의 무명 생활을 겪었다. 사실 말이 쉽지 15년은 긴 세월이다. 그는 이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일단은 배우자가 절 먹여 살려줘서 버틸 수 있었고요. 많이 힘들 때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죠. 제가 만약 최악의 경우 70살이고 낮에 알바를 하고 저녁에 어느 공원에서 가족들 앞에 서서 길거리 공연이나 마임을 하는 피에로가 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이었죠. 그게 제 갈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거는 그래도 행복하겠구나.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성공했다 안 했다 얘기를 하죠. 순수하게 연기를 하는 행위, 그 연기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하는 걸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거기에 관한 한 흔들림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최근 유태오는 할리우드 영화 '카로시'의 주역을 맡아 촬영을 마쳤다. 미국 유명 영화 배급사인 라이언스 게이트와 '존 윅'의 제작사인 87 일레븐 엔터테인먼트사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액션 스릴러물이다. 이처럼 그는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디든 전방위적으로 활동한다. 그의 향후 활동 계획은 뭘까.
"아주 간단해요. 좋은 걸 하고 싶어요. 시나리오가 좋은 게 첫 번째고 지역은 미국이든 독일이든 한국이든 크게 상관이 없어요. 글로벌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환경이 됐어요. 여러 나라에서 많은 시나리오들이 오지만 저는 일단은 재미있으면 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연기도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경계를 넘는 일이 아닐까. 어떤 배역을 받으면 그 배역의 캐릭터 안에 들어가면서 또 적당한 거리에서 컨트롤해야 하는는 경계인의 자세가 필요하다. 유태오가 생각하는 연기는 뭘까.
"저는 관객분들이 공감하고 재미있어하면 다라고 생각해요. 연기 기술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재미있어하면 되는 거죠. 제 직업이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잖아요. 그 비즈니스 안에서 엔터테이닝 해야 되는데 어떤 기술이든 어떤 연기든 그게 부조리가 되든 현실적인 리얼리즘이 되든 또 공포든 코미디든 멜로든 액션이든 일단 관객을 위해서 하는 거죠. 관객들이 즐거워하면 내 일을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글로벌 시대에 들어왔다. 제작 방식도 달라졌고 관객도 글로벌 대중으로 넓어졌다. 이제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글로벌을 염두에 두고, 문화 다양성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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