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1972년 9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권력 공고화를 위해 10월 유신(1972년 10월 17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계엄령 선포,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앞두고 정치 사회적으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박 대통령은 그해 9월 29일, 강원 춘천시 한 파출소장의 9살 난 딸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했다.
국가, 공권력에 도전이라며 '반드시 범인을 잡아라'고 김현옥 내무부 장관에게 엄명을 내렸다.
김 내무부 장관은 9월 30일 치안국장, 강원경찰국장, 춘천서장에게 "기한을 10일 줄 테니 법인을 잡아라, 아니면 관련자를 문책하겠다"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에 경찰은 내무부 장관이 정해 준 기한 마지막 날인 10월 9일 큰아들을 잃은 상심에 고향으로 내려와 만화방을 운영하던 30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문책의 두려움에서 빠져나왔다.
정부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공은 세운 형사에게 1계급 특진을, 나머지 형사들에겐 내무무 장관 표창을 내렸다.
◇ 증거는 피해자 옷에서 나온 만화방 표, 옆에 떨어져 있던 연필…억울 외쳤지만 무기징역
51년 전인 1973년 3월 30일 춘천지법은 강간치상,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원섭 씨(1936년생 당시 37세)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검찰이 피해자 A 양 옷에서 나온 만화방표(당시 만화방은 일정 금액을 내면 일정 시간 동안 TV를 볼 수 있는 일종의 입장권을 발행했다)와 A 양 시신 부근에서 발견된 연필을 살인 증거라고 제시했다.
법원은 정 씨가 수사과정에서 '내가 그랬다'고 자백한 점과 연필이 정 씨 아들 것이라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인 반면 "고문에 거짓자백했다"는 정 씨의 하소연을 뿌리쳤다.
정 씨는 국선변호를 자처하고 나선 이범렬 변호사(1971년 1차 사법파동의 주역)의 도움으로 항소, 상고했지만 번번이 기각당했다.
◇ 교도소의 선생님으로 존경받아, 15년 뒤 가석방…영화 7번방의 주인공
한국신학대학 54학번으로 당시 엘리트 계층이었던 정원섭 씨는 옥살이를 하는 동안 한글교실 선생님, 검정고시반 선생님으로 동료 재소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거친 재소자는 물론이고 교도관들도 그를 '정 선생님'이라며 깍듯하게 예우했다.
교도소 측으로부터 모범수 추전을 받아 무기징역형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 정 씨는 15년 2개월여 수감생활을 마치고 1987년 12월 25일 0시,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정 씨가 옥중에서 보인 따뜻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재심 과정이 알려진 뒤 그를 모티브롤 한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2013년 1월 개봉 돼 128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 파출소장 초등생 3학년 딸, 만화방에서 드라마 '여로' 본 뒤 실종…
정 씨를 나락으로 빠뜨렸던 춘천 파출소장 딸 A 양 사건은 1972년 9월 27일 오후 8시쯤 일어났다.
초등학교 3년생이던 A 양은 집 근처 정 씨의 만화방에서 당시 인기 절정의 KBS TV 일일 연속극 '여로'(오후 7시 30분~7시 50분 방영)를 본 뒤 집으로 가겠다며 가게를 나왔다.
A 양이 본 여로는 장욱제-태현실 주연의 일일 연속극으로 비공식적이지만 시청률 70%를 넘었다는 TV드라마 사상 최고 인기 작품이었다.
A 양이 돌아오지 않자 가족과 이웃들이 찾아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경찰도 간부의 딸이 실종됐기에 가출이 아닌 강력사건으로 보고 수사에 들어갔다.
9월 29일 인적이 드문 논두렁길에서 옷이 다 벗겨진 채 숨져 있는 A 양이 발견됐다.
◇ 피해자 시신 옆의 연필…정원섭 씨를 범인으로 몰아
A 양 몸에서 남성의 음모 한 가닥을 확보한 경찰은 시신 주변을 대대적으로 수색, A 양 옷에서 만화방 표, 또 논두렁길에서 하늘색 연필을 찾아냈다.
당시엔 유전자(DNA) 수사기법이 없었기에 경찰은 인근 남성들을 하나하나 불러 조사했다. 특히 만화방 주인 정원섭 씨를 주목했다.
정 씨가 범인으로 몰린 결정적 이유는 바로 연필.
하늘색 연필에 대해 정 씨의 아들이 '내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을 빌미삼아 경찰은 정 씨를 범인으로 몰고 갔다. 이 부분에서 당시 경찰이 연필을 슬쩍 사건 현장에 던져 놓았다는 설도 있지만 당시 경찰 기록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진실은 알 수 없다.
◇ 고문 강압에 허위 자백…남성 음모는 A형, 정 씨는 B형이었지만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다급해진 경찰은 연필을 핑계 삼아 5일간 거의 잠도 재우지 않고 통닭구이 등 고문과 협박을 번갈아 사용하며 정 씨를 다그쳤다.
견디다 못한 정 씨는 '내가 그랬다'며 거짓 자백했고 그 뒤는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을 이어갔다. 현장에서 나온 남성 음모를 감정한 결과 A형 사람의 것으로 판명됐다. 정 씨는 '내 혈액형은 B형이다'며 경찰, 검찰, 재판정에서 외쳤으나 혼자만의 메아리에 그쳤다.
◇ 거듭된 재심 기각, 36년 만에 무죄…형사 보상금 9억 6천만원 받았지만 손해 배상 0원
가석방 뒤 1991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정원섭 씨는 '살인 목사'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 1997년 서울 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다.
대법원도 2003년 정 씨의 청을 뿌리쳤지만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심을 권고, 정 씨는 다시 한번 법원에 희망을 걸었다.
결국 2008년 11월 춘천지법은 정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범인으로 몰린지 36년 1개월여가 흐른 시점이었다.
정 씨는 2011년 10월 27일 대법원에 의해 무죄를 최종 확정받았다.
정원섭 씨는 형사 보상금으로 4회에 걸쳐 9억 6000만 원을 받아 생활고 등에 따라 진 빚을 갚는데 사용했다.
36년의 억울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형사 보상금을 받았던 정 씨는 2016년 국가 등을 상대로 정신적, 경제적 손해 배상 소송을 냈지만 형사 보상금을 받은 지 6개월 이내 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
◇ 큰아들 잃은 상심에 고향으로 내려가 만화방…7번방 선물 주인공, 2021년 3월 하늘로
정원섭 씨는 신학대학을 나온 후 사진관을 운영해 제법 큰돈을 만졌고 또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큰아들을 병으로 잃자 상심한 정 씨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가 만화방을 열었다. 아들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 슬픔을 잠재울 심산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억울함을 동료 재소자 봉사, 목회 활동으로 씻어냈던 정인섭 씨는 2021년 3월 28일 향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