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뉴스1) 이승현 기자 = "곧 불법체류자 단속 시작이라는데,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어?"
법무부의 불법체류자 2차 합동 단속 소식이 알려진 6월 광주 광산구 일대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산단이 대거 입주해있는 광산구의 특성상 불법체류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긴장도 잠시 단속을 이틀 앞둔 10일, 광산구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의 커뮤니티에는 1개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곧 단속이 시작되니 저녁에 한번 모여서 놀자'는 취지의 글로, 고지된 장소는 월곡동의 한 단독주택 2층이었다.
오후 9시가 넘자 소식을 들은 베트남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돈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들이 말한 '모이자', '놀자'는 도박을 하자는 의미였다. 베트남 본국에서는 닭싸움을 할 때도 돈을 걸고 하는 등 이들에게 도박은 일상이자 스트레스 해소 도구였던 까닭에 본격 불법체류자 단속이 있기 전 스트레스를 풀자는 것이었다.
이내 23명이 모이자 자연스레 1500만원 상당의 도박판이 형성됐다. 카드를 이용해 이른바 '홀짝'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한 베트남 민속 도박 '속띠아'가 시작됐다.
이들은 게임이 잘 풀릴 땐 연신 환호성을 내질렀고, 반대로 돈을 잃을 땐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며 소란을 피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를 향했다.
사그라들지 않는 소음으로 새벽 잠을 설치던 인근 주민들이 보다 못해 '도박하는 외국인들로 시끄러워 잠을 못자겠다'며 11일 오전 3시16분쯤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도박판을 벌인 23명을 현행범 체포한 뒤 신원 확인과 기초 조사를 위해 이들을 월곡지구대로 임의동행했다.
인원이 많은 탓에 임의동행은 오전 5시40분쯤 마무리 됐고, 경찰은 차례대로 기초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이들을 지구대 내부 1층 회의실에 대기토록 했다.
임의동행 과정과 통역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에서도 이들은 도주하거나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
사실 이들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입은 바짝바짝 말랐고 속은 타들어갔다. 23명 중 14명이 불법체류자로 경찰 조사를 받는 만큼 강제추방 당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이면서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떻게서든 도망갈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다.
대부분 30대 초반으로 인근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촌에서 일용직을 하며 생계를 꾸려온 이들은 베트남으로 가면 경제적 상황도 악화되고 마땅한 거주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1명은 여자친구가 임신을 한 상황에 혼자 베트남으로 떠날 수 없었다.
지구대에는 근무조 1개팀 7명과 기동팀 5명 등 총 12명이 있었지만, 회의실에서 이들을 계속해서 감시하는 경찰은 없었다. 결국 감시 소홀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160㎝, 60㎏의 왜소한 체구를 가진 1명이 지구대 회의실 벽면 창문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창문 가까이서 이리 저리 살피더니 이내 창문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그러더니 창문에 몸을 구겨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몸이 빠져나갔다. 15도 가량 열리는 폭 20㎝의 비좁은 창문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1명이 대담한 탈주를 했고, 그 과정을 지켜본 여러명은 당황스러움도 잠시 웅성웅성거리며 바깥 눈치를 본 뒤 창문으로 향했다.
대부분 왜소한 체구를 지닌 만큼 먼저 나간 이의 행동을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여분 만에 10명이 각도 15도, 폭 20㎝ 창문을 통해 집단 도주했다.
이들은 행여나 신발 소리가 날까 모두 회의실에 신발을 벗어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맨발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곧장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를 끄고 유심칩도 제거했다.
신발이 없는 만큼 대다수는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막상 도주했지만 마땅히 갈만한 곳이나 계획이 없어 자신들에게 익숙한 장소로 향했다. 전에 일했던 공장 기숙사와 지인의 집 등이다. 집 근처서 헤맨 이들도 있었다.
타지에 지인이 있는 2명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전남 목포와 전북 완주로 도망치기도 했다. 자신의 현재 처지는 숨긴 채 무작정 찾아간 셈이었다.
경찰은 이들이 도주한 지 25분 가량이 지난 오전 6시40분쯤 상황을 인지했고, 폐쇄회로(CC)TV를 토대로 수색에 돌입했다.
베트남 출신 외사관도 투입됐다. 부티항 경장은 도박 모임 게시글이 올라온 커뮤니티와 모바일 메신저 등을 통해 이들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도주한 이들의 지인과 가족에게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해 자수를 권유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들이 멀리 가지 못 했을 거라고 판단하며 점점 수사망을 좁혀갔다.
은신처 등을 마련한 이들은 한숨을 돌리고 지인의 휴대전화 등을 이용해 경찰 수사 소식과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더이상 도망칠 수 없고, '다른 베트남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커뮤니티 내부 의견 등을 토대로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 대부분이 자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사건 발생 35시간 여만인 12일 오후 5시쯤 도주자 10명의 신병이 모두 확보됐다.
강제추방이 무서워 지구대 좁은 창문을 이용해 도망쳤던 이들의 최후는 강제추방 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한편 경찰은 도주자 관리를 소홀히 한 월곡지구대 경찰들에 대한 책임 소재와 범위 등을 파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