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한병찬 기자 = "갑질 엄청나게 많아요. 이유조차 모르겠습니다."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경비원 A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A씨는 "이곳 아파트 단지에 1만5000여명이 사는데 그런 분이 없을까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지난 13일 새벽 3시쯤 50대 주민 B씨가 도끼를 들고와 난동을 부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B씨는 "관리사무소가 폐가구를 3~4주 방치하는 등 일을 제대로 안 한다"며 재활용장에 있던 가구를 도끼로 부수고 경비실을 찾아가 유리창을 깨며 경비원을 위협했다.
30분 이상 난동을 부리던 B씨는 경찰이 출동하자 도끼를 순순히 내놓았지만 특수재물손괴와 특수협박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만난 아파트 주민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려견과 산책을 나온 50대 아파트 주민 전모씨는 "집에 도끼가 있는 것부터 황당하다"며 "재활용장에 쌓인 쓰레기를 안 치워 기분이 나빴다는데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60대 주민 김모씨도 쓰레기 문제는 한 번도 없었다며 "(폐가구를) 내놓은 사람이 잘못한 것인데 왜 업무 관련성도 없는 경비원에게 난동을 부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B씨가 난동을 부린 지 이틀이 지났지만 경비실 유리창은 아직 깨진 상태로 있다. 바람을 막기 위해 청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인 비닐에 하얀 눈송이가 부딪히고 있었다.
◇ '갑질방지법' 1년 지났지만…"갑질·폭언·폭행 여전"
2020년 5월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가 입주민의 폭언 및 폭행을 견디다 못해 극단선택을 했다.
이후 '경비원 갑질방지법'으로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이 지난해부터 시행됐지만 현장의 변화는 더딘 편이다. 경비원들은 여전히 갑질·폭언·폭행에 시달리고 있다.
강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6년째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모씨(66)는 지난해 8월 주민에게 폭행당해 머리와 무릎에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
박씨는 층간소음 문제로 초인종을 눌렀지만 돌아온 건 일가족의 폭행과 폭언이었다. 이들은 박씨를 밀고 당기고 가슴을 밀어 넘어뜨렸다.
박씨는 "아직 사과도 받지 못했다"며 "그때만 생각하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개똥을 치우라 하고 경비실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등 하루 2~3건 염장을 지르는 주민이 있다"고 덧붙였다.
인근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60대 경비원 김모씨는 낙엽을 포대에 담으며 "예전처럼 '내 돈으로 먹고 살면서'라고 폭언하는 주민은 많이 줄었다"면서도 "줄었다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마스크는 입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 "경비원 경시 문화 뿌리 깊어…엄격 대응해야"
전문가들은 뿌리 깊은 경비원 경시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중 처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갑질방지법이 통과됐는데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경비원 경시 문화가 뿌리 깊다는 것을 방증한다며 "법이 만들어졌지만 효과를 아직 못내고 있다는 게 이번 사건에서 확인됐다"고 말했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비원분들의 고용 상황을 좋게 해드리는 것 못지않게 주민들의 시민의식이 중요하다"며 "이번처럼 이웃과 경비원에게 위해가 되는 사건에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그러면서도 "일종의 시민 교육을 이수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