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 뛰노는 메타버스에 드리운 '성범죄' 그림자

입력 2022.04.18 05:02수정 2022.04.18 21:07
자녀들 뛰노는 메타버스에 드리운 '성범죄' 그림자
기자가 17일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 속 '한강공원' 맵에 접속한 화면.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


자녀들 뛰노는 메타버스에 드리운 '성범죄' 그림자
메타버스 플랫폼 이프랜드 내 마련된 '벚꽃엔딩’ 랜드 속 화면.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중학교 2학년 A양은 한 메타버스 플랫폼 내에서 교복을 입은 남성 캐릭터 B로부터 '왕게임'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특정 건물에 먼저 올라가기', '음식 빨리 먹기' 등 메타버스 내 특정 과제를 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응했지만 B는 '사진을 보내달라'는 등 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B는 부계정까지 만들어 A양을 따라다녔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메시지는 물론 메타버스상 A양의 집 주변에 낙서까지 했다. B는 A양에게 거짓 소문을 퍼트리겠다고 협박한 후 아바타를 통해 유사 성행위를 하는 듯한 행동도 요구했다.

일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언어적 성희롱·스토킹 등 사이버폭력이 잇따르고 있다. 이 같은 행위는 개인이 가상공간 활동을 위해 만든 '아바타'를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위 사례는 범행 사례를 재구성한 것인데, 가상 공간은 현실 세계와 비교해 타인에 대한 심리적 경계가 낮은 만큼 방치할 경우 자칫 디지털 성범죄로 발전할 위험이 크다.

메타버스 주 이용자인 미성년자가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구조인데 관련 수사 시스템이나 규정은 미비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메타버스 이용자 10명 중 7명 아동·청소년…성범죄 우려↑

메타버스는 10대들의 놀이터다. 국내 널리 알려진 메타버스 플랫폼으론 '제페토'가 있는데, 지난해 12월 기준 글로벌 이용자는 2억5000만명을 돌파했다. 한국 이용자 비율은 10% 안팎으로, 주 이용자는 미성년자와 여성이다. 닐슨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제페토 이용자 10명 중 7명은 아동·청소년이었다. 성별로 보면 남성 23%, 여성 77%로 여성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글로벌 1위 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의 이용자 현황도 유사하다.

이런 메타버스에서 미성년자에게 신체 부위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바타를 강제추행 하는 등 신종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아바타에게 유사 성행위 자세를 취하게 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메타버스로 친분을 쌓아 실제 만남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과거 텔레그램을 이용해 온·오프라인을 오가며 이어진 성착취 범죄가 메타버스에서 반복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주 이용층이 성범죄에 대한 개념이 잡히지 않은 아동·청소년인데다 이용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고려하면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설령 피해를 입어도 입증이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드러나지 않은 피해 사례도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약 1년간 제페토에서 게임 아이템이나 기프티콘을 선물하는 방식으로 미성년자의 환심을 산 후 노출 사진 등을 전송받아 성착취물을 제작한 30대 남성이 최근 구속되기도 했다. 선물을 주면서 유대감을 형성, 피해자들이 노출 사진과 영상을 보내도록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온라인 그루밍'에 해당한다.

메타버스 내에선 성별, 나이, 아바타 상태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어 익명성이 보장된다. 부계정도 운영할 수 있고 역할·상황극이나 멤버놀이 등 고유 문화가 존재해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메타버스 내에서 빈번하게 성적 괴롭힘이 이뤄지고 그 내용이 남는 경우 2차 가해의 우려도 높다.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사이버공간·휴대전화를 통해 발생한 아동·청소년 대상 온라인 성착취 범죄는 2016년 전체의 4.7%에서 2020년 12.9%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문제는 관련 범죄가 급증할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는 '치안전망 2022' 보고서에서 메타버스 플랫폼을 중심으로 재산권 침해, 아동·청소년 성폭력 등 신종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준화 국회 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 조사관은 "메타버스 이용자가 늘어나며 아바타에 대한 성범죄도 발생하고 있다"며 "10대·여성 이용자의 규모가 증가하는 추세를 고려하면 관련 성범죄도 앞으로 늘어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 아바타 성희롱·스토킹 처벌…기존 법률론 한계

그러나 현행법상 메타버스에서 일어난 일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아바타가 가상세계에서 언어적 성희롱이나 스토킹, 불법촬영 등을 당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더라도 처벌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사람'을 직접 만지고 추행하는 것은 엄연한 제재 대상이지만 디지털 표현물인 아바타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비신체적인 성폭력에 대한 입법 공백을 해소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국회와 관계부처의 토론회 등이 연이어 열리고 있으나 구체화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끼리 벌이는 행위까지 범죄로 보는 건 과잉 입법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기술적인 조치를 통해 범죄 행위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채팅 시 특정 단어를 쓰지 못하도록 한 '금칙어' 설정 기술도 현재 단어 사이에 별도 문자를 넣으면 충분히 뜻이 전달되고 있어 고도화가 필요하다.

선제적인 움직임도 있다. 최근 메타(옛 페이스북)는 메타버스 플랫폼 '호라이즌 월드' '호라이즌 베뉴'에 성범죄 방지를 위한 아바타 간 거리두기 기능을 도입했다. 아바타 주변에 '개인 경계선'을 부여, 아바타 간 4피트(약 1.2m)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 것인데 이는 아바타 간 원치 않는 성적 접촉과 괴롭힘을 막기 위한 조치다.

향후 수사와 재판 과정을 위해 서비스 제공 업체가 가해자에 대한 인적 정보를 보존·관리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국제 공조와 부처 간 협력도 필수다.
가해자나 본사가 외국에 있을 경우 현실적으로 처벌이 쉽지 않다. 지난 1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던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처벌규정 부재로 인한 문제보다는 수사관할권의 문제가 본질"이라며 "수사 관할 및 협조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준화 조사관은 "메타버스 내 성범죄의 세부적인 통계를 수집·분석해 이에 근거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수사 기관과 법·제도를 담당하는 부처 간 정보공유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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