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뉴스1) 이수민 기자 =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비무장한 민간인을 참혹하게 살상했다는 유의미한 증언이 확보됐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27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저동 위원회 대강당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출범 2주년 주요 경과와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조사위는 "비무장 민간인 살상의 참혹한 사건들을 추가로 확인하고 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지난 2년간 광주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 장·사병들의 증언과 제보, 교차 검증 등을 통해 광주 외곽 봉쇄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확인사살과 시체 추가 훼손, 저격수에 의한 민간인 사살 등 시위와 무관한 비무장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참혹한 학살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5·18민주화운동 보상심의자료 등을 토대로 2500여 상이자들의 부상실태를 조사·분석한 결과 총상 피해자는 360명이 넘고 대검에 의한 부상도 90건이 넘는 것을 확인했다.
광주지방검찰청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서와 비교·분석하면 총상 사망자 131명 중 흉부 이상에 피격돼 사망한 민간인은 116명에 이른다.
흉부 이상 총상 사망자의 날짜별 분포로 보면 Δ5월20일 4명 Δ5월21일 48명 Δ5월22일 22명 Δ5월23일 23명 Δ5월24일 7명 Δ5월27일15명 Δ날짜 미상 1명 순이고 사망 장소는 광주시내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5·18조사위는 "계엄군과 일부 무장한 시위대 사이 교전이 있기는 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이 시위진압이나 자위권 행사의 수준을 넘는 반인도적 행위였음을 입증한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시위와 관련 없는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살상행위가 알려진 것보다 '더욱 참혹하게' 벌어졌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저항불능 상태인 부상자를 현장에서 사살했다", "23일 광주-화순간 도로 미니버스 사건에서 정차한 차량 안으로 들어가 확인사살 했다"고 증언했다.
효덕초등학교 삼거리 부근 민가에서 체포된 민간인을 2m의 지근거리에서 총격으로 절명케 하고 쓰러진 시체의 머리를 군홧발로 짓이긴 뒤, 개인적으로 휴대했던 정글도를 이용해 시체를 내려치는 등 추가 훼손까지 자행했다는 진술도 확보됐다.
이같은 진술은 사망자의 시체 검시에도 드러난다. 사망자 검시의사는 광주-화순간 도로에서 수습된 시체 7구의 경우 최소 6발에서 최대 13발까지 실탄 사입구가 있다고 봤다. 또 효덕동에서 수습된 시체에 두부열창과 좌복부 자상 등의 사망원인을 확인했다.
지난 출범 1주년 발표 때 공개했던 진술에 이어 저격수 운용 조준사격 증언도 추가로 확보했다.
조사위는 제3공수여단과 제11공수여단, 제20사단이 저격수를 운용해 시위대를 조준·사살했었다는 사실을 저격수 당사자의 인정진술과 현장에 함께 있었던 계엄군들의 증언, 피해자의 신원을 통해 교차 확인했다.
5월21일 오후 1시쯤 도청 앞 집단발포 당시 전일빌딩 옥상에 저격수로 배치됐던 제11공수여단 한 모 일병은 자신이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던 청년을 조준해 저격한 사실을 인정했다. 조사위는 이 피해자가 민간인 조 모씨 임을 확인했다.
또 20사단 소속 조 모 병사는 27일 새벽 회사에서 숙직을 하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던 민간인 오 모씨를 저격, 사살한 후 건물 밖으로 떨어진 시체를 공용 터미널로 옮겼다고 진술했다.
이는 지금까지 유탄에 피격·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그 진상이 새롭게 규명된 사건 중 하나다.
조사위 관계자는 "이와 같은 사건들은 조사관들이 가해 당사자들의 인정진술을 확보하고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계엄군 장·사병들의 증언을 들은 뒤 가해자의 인정진술과 여러 증언들을 교차 확인해 규명해 낸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1980년 6월11일 미국방정보국(DIA)이 2급비밀전문에 표기한 '광주사태는 한국판 미라이사건'이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며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진상규명을 통한 '국민통합'의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