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뉴스1) 오현지 기자 = 동이 튼 지 얼마 안 된 14일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한 도로에서 발생한 음주 뺑소니 교통사고 현장에는 약 40㎝ 크기의 범퍼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경찰이 출동했을 당시 차에 치인 피해자는 이미 숨져 있었으며, 가해 운전자는 현장에서 도주한 상태였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부터 뒤졌지만 사고가 새벽 1시쯤 발생한 탓에 차종과 차량 번호 식별이 어려웠다.
사고차량에서 떨어진 범퍼 조각만이 당장 손에 잡힌 단서였다. 하지만 경찰은 약 2시간 만인 오전 8시30분쯤 가해 차량 운전자 A씨를 신속하게 검거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범퍼를 보자마자 차종은 물론 차량 연식까지 한눈에 파악한 경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제주동부경찰서 교통조사계 김상우 경위(43).
김 경위는 이 범퍼만 보고 가해 차량이 10년 이상 된 일본산 수입 승용차로 특정했다.
김 경위는 "안개등과 미등이 일치하는 차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어 외제차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했다"며 "국산차가 아니라면 일본 혹은 유럽차인데 유럽차의 경우 등화장치가 각 법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본차로 특정했다"고 설명했다.
또 세단은 보통 범퍼 외형 각도가 곡선을 띄는데 해당 범퍼는 직선 형태를 띠고 있어 승용차량으로 용의차량을 특정할 수 있었다.
연식 역시 '자동차광' 김 경위에겐 쉬운 문제였다.
그는 "안개등과 미등이 모두 전구형 타입이었다"며 "2015년 이후부터는 세계적으로 전구형이 아닌 LED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10년 이상 된 차량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김 경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당 차량이 4종류의 페이스리프트(외관 개조)가 진행된 점으로 미뤄보아 2011년 이전 생산된 모델이라는 점 역시 파악했다.
김 경위의 용의차량 분석이 끝나자 이 정보들을 토대로 차적 조회가 이뤄졌다.
차적 조회 결과 해당 차량은 제주도 내 약 100대가 확인됐고, 사고 인근 지역으로 범위를 좁히자 10대 정도로 용의차량이 간추려졌다.
이를 토대로 탐문을 시작한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천읍의 한 주거지에서 용의자 A씨를 긴급체포할 수 있었다.
경찰 체포 당시 A씨는 면허 정지 수준의 음주 상태였으며, 술을 마신 채 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고 진술했다.
만약 김 경위의 활약이 없어 검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피의자의 음주를 감지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김 경위는 "뺑소니의 경우 현장 검거가 어렵게 때문에 피의자 알코올 측정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다툼"이라며 "조속히 검거하지 않으면 입증하기 어려운데 이번엔 상황이 잘 풀려 조기검거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김 경위는 작년에도 차량의 유리창 모양만 보고 보행자를 치고 달아난 뺑소니범을 검거하기도 했다.
김 경위의 이 같은 활약은 전부 그의 '자동차 사랑'에서 시작됐다.
그는 "어린 시절 현대자동차의 포니에 매료돼 그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며 "자동차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운전병 출신이기도 하고 계속 자동차에 관해 공부해왔다"고 설명했다.
특히 2년 전 교통조사계로 발령받은 후부터는 빠르게 변하는 차량 디자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 집중한다고 했다.
김 경위는 "경찰이 피해자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건 피의자 조기검거라고 생각한다"며 "조기검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앞으로도 자동차를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공부해 피의자 검거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사고 발생 시간과 피의자 체포 시간에 차이가 있는만큼 정확한 음주 측정을 위해 위드마크 공식을 적용하는 한편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