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광주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정지선)는 '기아자동차에 취업을 시켜주겠다'고 616명을 속여 135억원을 가로챈 A씨(35)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A씨는 중형을 예상이라도 한 듯 무심한 표정으로 재판장의 판결문을 들었다.
누런 죄수복을 입고 포승에 묶여 있던 그는 판결 직후 서둘러 법정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피해자 등 방청객들은 허탈해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30대에 불과한 그가 이런 '역대급 사기'를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그의 범죄는 광주의 한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는 십수 년 전부터 교회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B목사(53)와 목사의 지인인 C씨를 통해 사기를 계획했다.
B목사와 C씨는 A씨의 부모까지 알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
A씨는 교회에서 잘 지내왔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예의 바른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2018년 무렵 A씨는 기아자동차 로고가 있는 점퍼를 입고 교회에 드나들며, 자신이 기아자동차 협력업체 직원임을 은근히 알렸다.
특히 A씨는 자신이 최근 기아차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는 소문을 냈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서는 그에게 정규직으로 전환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직도 예전처럼 돈을 줘야 하는지 등을 묻는 질문이 잇따랐다.
그러다 해가 바뀐 2019년 2월 A씨는 C씨에게 전화해 "제가 다니던 사내 협력업체의 사장이 '회사에 들어와 있으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한다. 4명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장님께 말해서 교회 청년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A씨는 C씨에게 "보증금 명목의 일정 사례금을 주면 협력업체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인 것처럼 기아차에 추천해서 취업을 시켜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C씨는 과거에도 '돈을 써야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 등의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A씨의 이야기를 주변에 알렸다.
C씨는 당시 B목사가 교회에서 취업 때문에 고민하는 청년들에 대한 상담 등을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A씨를 소개했다.
이후 A씨는 B목사에게 자신이 있었던 협력업체 회사 사장이라는 사람도 소개했고, 기아차와 인력 관련 계약이 돼 있는 서류도 보여줬다. 또 자신이 단체 메시지 방을 보여준다거나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내역도 보여줬다.
B목사와 C씨는 이때부터 A씨의 범행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교회 D목사도 A씨에 소개했다.
교회에 아는 사람들이 한 명씩 취업 청탁을 해오면서 이들은 A씨의 일을 봐주는 사람이 됐다.
이들은 구직자들에게 각각 2000만~5000만원을 받아 A씨에 넘기고 일정 금액을 받아 챙겼다.
시간이 갈수록 취업 청탁자도 급격히 늘어만 갔다.
A씨는 당초 2019년 7월10일을 기아자동차 합격자 발표날이라고 밝혔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날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둔 9일 뉴스에 불법 파견과 관련해 기아자동차 사장이 기소됐다는 뉴스가 언론을 통해 나왔다.
A씨는 B목사에게 연락해 회사에서 긴급회의를 했는데 이같은 상황에서 합격자 발표를 할 수 없다고 연락했다.
B목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회사에 큰일이 터졌는데 합격자를 발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는 사이 A씨는 "고용노동부 앞마당에서 기아차 비정규직 노조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데 천막농성 노조원의 자녀를 채용하고 노조는 천막농성을 철거하기로 했다. 노조원 자녀의 채용 보증금을 줘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다. 천막농성이 철거돼야 다른 지원자들의 취업 발표도 가능하다"고 또다시 B목사와 C씨를 속인 뒤 다시 거액을 송금 받고 일정 금액을 이들에 줬다.
또 A씨는 같은 해 8월에도 "고용노동부가 기아차 취업과 관련해 뇌물을 요구하는 데 돈이 부족하다. 돈만 주면 정규직 전환 채용자를 바로 발표한다고 한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A씨는 2020년이 돼서도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취업 발표가 늦어질 수도 있다, 정상적으로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피해자들도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문제를 보이고 있는 만큼 기업에서 사람들을 채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해를 하고 넘어갔다.
이후 올해 8월21일에 발표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또 날짜를 넘기면서 피해자들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진행됐다.
이렇게 2019년 2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교인 등 616명에게 '기아차에 취업을 시켜주겠다'고 속여 135억원을 가로챈 A씨의 범행은 탄로가 났다.
경찰 조사결과 그는 기아자동차 관련 업체에서 근무하지 않았으며, 기아차 관계자들과 어떠한 연관성도 없었다.
목사 등에게 보여준 계약 관련 서류도 전부 위조한 것이었다.
피해자들을 속이고 편취한 돈 대부분도 인터넷 도박 등으로 사용했다.
인터넷 BJ를 후원하는 데 수억원을 쓰고, 롤스로이스 등 고급 외제차를 타고 인터넷방송에 등장하기도 했다. 명품시계 등을 구입하는데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결국 지난해 9월 구속기소 돼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A씨에 대해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A씨는 첫 공판에서부터 범행 대부분을 인정했다.
다만 "검찰 측의 공소 내용을 대부분 인정하나, 범행에 전적으로 관여한 B목사 등이 단순 사기죄로 재판에 넘겨진 것은 부당하다. 공범이다"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면서 B목사 등과의 사건 병합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현재 B목사와 C씨 등에 대한 재판도 별도로 진행 중이다.
B목사는 2019년 10월30일부터 2020년 8월15일까지 기아차 취업 사기와 관련된 A씨의 제안에 따라 취업 지원자들 374명을 모집해 73억1500만원을 편취할 수 있도록 방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C씨는 2019년 5월4일부터 2020년 6월24일까지 기아자동차 취업지원자 8명을 모집해주고 대가로 4650만원을 받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다른 D목사는 2019년 2월12일부터 2019년 11월29일까지 기아차 취업지원자 22명을 모집해주고 8250만원을 받는 등 영리를 목적으로 타인의 취업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B목사 등은 "A씨에게 돈을 지급하면 진짜 취업이 될 것으로 알았다"고 A씨의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지난 24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 각 범행은 A씨가 종교인 B씨에게 정규직 채용 희망자를 계속적으로 모집하도록 하고, 피해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납입하면 정규직 근로자로 채용되게 해주겠다고 거짓말해 1년 6개월 동안 600명이 넘는 피해자들로부터 약 135억원을 교부받아 편취한 것으로 범행의 수단과 방법, 횟수, 범행기간, 피해규모 등에 비춰 그 죄책이 매우 무겁다"고 말했다.
이어 "비록 피해자들이 금전지급을 통해 이례적인 방법으로 채용 기회를 얻으려고 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고인이 장기간 동안 적극적인 기망행위를 통해 다수의 구직자로부터 취업보증금을 편취했고, 이를 사치품 구입과 도박 등으로 탕진해 피해를 거의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비난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