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혜민 기자 = 유난했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 날씨가 화창했던 2013년 9월의 어느날. 당시 33세였던 A씨(여)는 사랑을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만난 '집안 빵빵한' 의사 B씨(당시 41세, 남)와 함께.
인터넷채팅사이트에서 만난 A씨와 B씨는 8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돼 둘은 연인이 됐다.
B씨와 B씨의 집안은 훌륭해 보였다. 그의 직업은 의사이며 변호사인 그의 아버지는 로펌대표라고 했다. 그의 첫째 형은 부장검사고 둘째 형은 외국계 회사 대표라고도 했다. 이상하리만치 '완벽한 집안'이었다.
B씨는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대체복무로 보건복지부에서 의사 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만난지 약 2개월이 된 시점인 그해 11월부터 B씨는 전문 의학서적이 필요하다며 책값을 꿔달라고 부탁했다.
B씨는 "책값이 1년에 4번 들어간다"며 "그중 2번은 2000만~3000만원씩 들어가는데, 대체복무가 끝나면 꼭 갚겠다"고 말했다.
B씨의 음주운전 합의금도 A씨가 대신 지불했다. 이렇게 A씨는 2018년 11월까지 B씨와 5년 이상 연애를 하며 총 114회에 걸쳐 1억799만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알고보니 아이가 둘이나 있는 유부남이었다. 게다가 의사도 아니었고 가족들의 직업도 거짓말로 꾸며낸 것이었다.
B씨는 청소용역업체에서 일을 하고는 있으나 뚜렷한 수입은 없었다. 또 이미 신용불량 상태로 1억원이 넘는 빚이 있었고 돈을 갚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B씨는 사랑을 속삭였던 5년여의 세월 동안 A씨를 철저히 속여왔던 것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사랑의 끝은 파국이었다. B씨는 결국 구속된 채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16일 서울동부지법 서울동부지법 형사12단독(판사 박창희)는 B씨(현재 48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혐의는 '사기'였다.
B씨는 2019년 12월 위험운전치상(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또다시 재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합의금을 A씨가 대신 내준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부는 "인적 친밀관계를 이용해 피해자를 기망해 돈을 편취한 것으로 죄질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또 "피고인은 장기간에 걸쳐 피해자로부터 돈을 편취했고 그 액수도 1억원이 넘는 거액인 점,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피해자에게 피해회복을 해 주지 못한 점에 비춰보면 피고인에 대한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B씨는 처벌받겠지만, A씨가 허공에 날려버린 1억여원과 5년이 넘는 세월은 그 누구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재판 당시 B씨의 아내와 자녀는 B씨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다. B씨는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위와 같은 범죄는 피해자에 대한 이성적 관심을 가장, 결혼이나 사업 따위에 자금이 필요하다며 상대방에게 돈을 요구하는 사기범죄, 즉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으로 분류된다.
공정식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과)는 "최근 디지털 성범죄나 로맨스 스캠을 보면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기존의 범죄들이 인터넷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로맨스 스캠 범죄는 피해가 광범위하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 범죄보다 더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며 "법 개정을 통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로맨스 스캠 범죄가 점점 더 치밀해지고 지능화하고 있다"며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당하는 범죄가 아니라 '누구나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