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고(故)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비망록이 공개되며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검찰과 한 전 총리의 악연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한 전 총리와 검찰의 악연의 시작은 2009년 12월부터였다. 조선일보는 12월4일 검찰이 한 전 총리가 5만 달러의 뇌물 수수를 한 의혹을 수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한 전 총리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은 한 전 총리가 총리 재직 시절인 2006년 12월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대한석탄공사 사장에 임명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5만달러를 받았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 조사 때 곽 전 사장은 "총리실 공관에서 한 전 총리, 정세균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 등 5, 6명과 함께 식사한 뒤 나가면서 5만 달러 정도를 한 전 총리에게 건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곽 전 사장은 1심 법정에서 "총리 공관 식당 의자에 5만 달러 돈 봉투를 두고 나왔다"고 주장하며 기존 검찰 조사 진술을 뒤집었다.
그런데 검찰은 한 전 총리 1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한신건영을 압수수색했다. 이 압수수색을 두고 검찰이 뇌물 사건이 무죄가 날 경우를 대비해 당시 야당 서울시장 후보로 떠오르던 한 전 총리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엮으려고 하는 '표적 수사'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검찰은 당시 사기죄로 구속된 한만호 전 대표를 소환조사해 2010년 4월 "한명숙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에게 9억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검찰은 이 진술을 토대로 2010년 7월 20일 한 전 총리를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앞서 기소된 뇌물 수수 사건은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기소 이전인 2010년 4월 1심에서 무죄를, 기소 이후인 2011년 1월 2심에서도 무죄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2013년 3월 이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불법 정치자금 사건이었다. 이 사건도 앞선 뇌물 수수 사건과 마찬가지로 핵심 증인인 공여자가 진술을 번복했다. 한 전 대표는 2010년 12월 1심 2차 공판에서 기존 검찰 수사 때 한 진술을 번복해 9억원 전달 사실을 부인했다.
이에 검찰은 위증 혐의로 한 전 대표가 수감돼있던 구치소 감방을 압수수색 해 비망록과 일기장 등을 압수했다. 이후 검찰은 한 전 대표를 위증죄로 재판에 넘기고, 이때 압수한 비망록을 증거로 제출하며 "진술 조작을 위한 시나리오"라고 주장했다. 한 전 대표는 위증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형이 확정됐다.
2011년 10월 한 전 총리는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는 "한 전 총리가 한 전 대표로부터 9억원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뿐"이라며 "그러나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은 기록과 제반 사정에 비춰 합리성과 일관성 등이 없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한 전 대표가 한 전 총리에게 직접 정치자금을 건넬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는지와 돈을 전달한 방식 등이 의심이 간다"며 "환전내역, 금융자료 등도 한 전 총리를 유죄로 판단하기에 부족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3년 9월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유죄로 판단,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8000만원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와 달리 2심 재판부는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의 신빙성을 모두 인정했다. 다만 한 전 총리를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2심 재판부는 1심에서 한 전 대표의 자금조달 과정에 대한 검찰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점에 대해 "직원의 진술, 자금조성 내역 등 자료를 보면 한 전 대표의 진술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또 금품공여장소, 방법, 시기 등에 대해 한 전 대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한 1심과는 달리 2심 재판부는 이 부분에서도 신빙성을 모두 인정했다.
유무죄가 엇갈린 불법 정치자금 사건 역시 뇌물 수수 사건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에 올라갔다. 대법원 판결은 2심 판결이 있은 지 2년 가까이 지난 2015년 8월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8 대 5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관 전원은 한 전 총리가 1차로 3억원을 받은 혐의는 유죄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한 전 대표가 조성한 자금에 포함된 1억원 수표가 한 전 총리 동생의 전세금으로 사용한 사실이 있다"며 "한 전 총리 동생이 서로 모르는 사이인 한 전 대표로부터 1억원 수표를 받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또 한 전 대표가 검찰 수사에서 '한 전 총리가 2억원을 반환했다'고 진술한 것을 볼 때도 2억원도 수수를 한 뒤 돌려준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 전 총리가 부도 충격으로 입원한 한 전 대표의 병문안을 다녀간 후 비서 김모씨를 통해 2억원을 돌려줬고 이후 한 의원과 한 전 대표가 2차례 통화한 사실이 있음을 근거로 들었다.
다만 나머지 6억원에 대해서는 다수의견(8명)과 소수의견(5명)으로 나뉘었다. 다수의견은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에 신빙성을 인정하면서 이와 일치하는 증거와 증인 진술이 나머지 6억원에 대한 혐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이인복·이상훈·김용덕·박보영·김소영 대법관 등 5명은 반대의견을 내면서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 대법관 등은 "7개월에 걸쳐 수십 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1회와 5회 진술서 외에는 자료가 없는 등 수사의 정형을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또 비자금장부나 경리부장의 진술도 신뢰하기 어렵다며 원심 판결이 전체적으로 파기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결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된 한 전 총리는 수감됐고 2년이 지난 2017년 8월 의정부시 송산동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2009년 12월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기소를 당한 지 10년 5개월 후인 지난 5월14일 '뉴스타파'가 한씨의 비망록 내용을 보도하며 다시 한 전 총리 사건이 정치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한 전 대표는 비망록에서 자신이 추가 기소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사업 재기를 도와주겠다는 검찰의 약속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다며 자신을 '검찰의 강아지'가 됐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또 검찰 조사 때 진술조서를 암기시키고 테스트를 하는 등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을 상황을 검찰과 합의하고 진술을 연습했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한 전 대표의 비망록이 공개되자 여권은 한 전 총리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모든 정황이 한명숙 전 총리가 사법농단의 피해자임을 가리킨다"며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 이대로 넘어가야 하나.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문에 대해 "검찰 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특정 사건과의 연관성에 집착하기보다 (잘못된) 풍토를 개선하는 제도 개선을 위해서도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구체적인 정밀 조사가 있을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이에 한 전 총리 사건을 수사한 수사팀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비망록의 내용은 새로울 것도 없고 관련해 아무런 의혹도 없다"며 "비망록은 엄격한 사법적 판단을 받은 문건으로 허위사실을 기재했다"고 반발했다.
수사팀은 비망록이 1심 재판 때부터 정식 증거로 채택돼 재판부와 변호인 모두 그 내용을 검토했고, 한 전 대표가 통상의 노트에 '‘참회록, 변호인 접견노트, 참고노트, 메모노트' 등의 제목을 붙인 후 검찰 진술을 번복하고 법정에서 허위 증언을 하려는 계획 등을 기재했다"며 "한 전 사장은 이를 법정에서 악용하기 위해 다수의 허위사실을 기재했다"고 반박했다.
수사팀은 "(당시 재판부는) 한 전 사장의 노트에 기재된 의혹을 모두 근거 없다고 판단해 검사가 작성한 한 전 사장의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한 전 총리에 대해 유죄판결을 선고하고 확정했다"며 검찰의 회유·협박 등 의혹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