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이기림 기자 = "우석이 모습이 안 보여서 동네 아이들을 불러 물었죠. 혹시 못 봤냐고. 돌아온 말은 '우석이 어떤 트럭 타고 가던데요'였어요."
이장호씨(72)는 1982년 2월18일 우석군이 사라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우석군은 대구 서구에서 어머니가 운영 중인 미용실 앞에서 분무기를 갖고 놀고 있었다. 이씨는 우석군에게 "멀리 가지 말아라"라고 말했고 우석군도 "응"이라고 답했다. 이게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씨는 그 뒤로 아내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고 아들 찾기에 몰두했다. 관련 기관이나 보육시설에서도 이씨의 간절함을 알고 실종아동이 들어올 때마다 연락을 해줬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우석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를 찾는 일은 정말 고생 그 자체다. 이장호씨는 "아이 찾는 데에만 몇 년 집중하니까 재산이 거덜나더라"라며 "다른 실종아동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정말 힘들게 산다"고 말했다. 폐인이 되거나 그 어려움에 결국 아이 찾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이장호씨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족들의 형편이 괜찮아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도 결국 생계유지를 위해 온전히 우석군 찾기에 몰두할 수 없었다. 택시 일을 시작한 그는 아들 실종 8년 만에 딸을 낳아 길렀다. 하지만 우석군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아들을 계속 찾았다.
2019년 9월, 아들의 얼굴을 못 본 지도 어느덧 37년이 지났다. 그토록 만나고 싶은 아들임에도 꿈속에라도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도 사치였다. 이장호씨는 서서히 늙어가고 있고, 눈앞에 아른거리던 아들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만 가고 있다.
이씨는 그런 점으로 미뤄볼 때 생각한 실종아동 찾기의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시설이나 정부 차원에서 실종아동들에게 부모찾기를 하도록 홍보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을 포함해 많은 부모들의 나이가 70~80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1980년대에는 해외입양을 떠나는 아이들이 많았다. 6·25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현재까지 20만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는데, 1980년대에만 6만6000여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떠났다. 이씨는 "당시 해외로 떠난 아이들은 실종된 아이들까지 부모가 버렸다고 생각한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부에서 현재 모습을 추정해 몽타주를 만들어줘도, DNA를 제공해도 결국 아이들이 찾지 않는 한 가족을 찾기 어렵다는 말을 덤덤한 말투로 이어갔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굳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이씨의 모습에서 슬픔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장호씨는 아직 아들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석이가 열심히 살고,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돼 좋은 일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건강하게 양부모님 계시다면 잘 모시고…. 이 나이 돼서 같이 살겠나요 뭐. 그냥 솔직하게 생사라도 확인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