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이희호 여사, 이화여대 2년만에 '강제졸업'한 사연

입력 2019.06.13 16:56수정 2019.06.13 17:24
오랜 기간 이화여대 학력은 인정받지 못했다
故이희호 여사, 이화여대 2년만에 '강제졸업'한 사연
김대중평화센터가 12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생전 모습을 공개했다. 사진은 1958년 이 여사(뒷줄 왼쪽 네 번째)가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 재직 당시 제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19.6.12/뉴스1


일제치하에 이화여전 폐교 압력…청년연성소로 격하
훗날 장상 전 총장에 "이대 학력 몰라줘서 속상해" 토로하기도

(서울=뉴스1) 정연주 기자 = 고(故) 이희호 여사는 어느 날 장상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찾아 하소연했다. 사람들이 이 여사가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이 여사는 국내에서만 2개의 대학교에 다녔다. 1942년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 문과에 입학했으나, 4년제 학교를 2년만에 강제 졸업한다. 이후 서울대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 사범대학을 졸업했지만 오랜 기간 이화여대 학력은 인정받지 못했다. 지극히 개인사인 듯 보이나, 그 배경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비극과 맞닿아있다.

이 여사와의 오랜 인연으로 훗날 이 여사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장 전 총장은 12일 기자들과 만나 이 여사와의 추억을 회고했다. 그는 "여사님이 영부인이 된 이후 저를 만났는데, 좀 속상한 것이 있다고 해서 이유를 물었다"며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언제나 학력이 생략되니 학력을 찾아달라 부탁하더라"고 전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이화여전은 폐교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1943년 일제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을 내리고, 이화여전을 12월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꾼다. 문과를 포함한 3개 학과가 연성소로 통폐합되고 기존 교육과정이 모두 중단됐다.

그 과정에서 학교에 남아 있으면 정신대에 끌려갈 수 있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상당수 학생은 학교를 그만뒀다. 버틴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 여사는 강제로 황국신민 교육에 동행되면서까지 학업을 이어가려 했지만, 1944년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하루아침에 강제졸업했다. 입학한 지 2년 만이었다.

이 여사의 '고난의 길, 신념의 길' 평전에도 이 일이 자세히 담겨 있다. 평전에 따르면 이 여사는 1945년 해방이후 이화여대를 다시 찾았으나, '향수'로 유명한 시인인 정지용 당시 문과 과장이 3학년이 아닌 2학년으로 시험을 봐서 편입하라는 말에 좌절했다. 이 여사는 "2년을 허송하다 후배들과 학교를 같이 다닌 것도 억울한데, 시험을 또 쳐서 2학년부터 다닌다니 기운이 쭉 빠졌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으나, 한참 후에도 이화여대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이유에 대해 장 전 총장은 "이화에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나왔다. 그 대열에 당신(이 여사)도 함께하고 싶은 것이죠"라고 대변했다.

장 전 총장은 "이 여사의 말에 1944년 당시 학적부를 찾았으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전했다. 장 전 총장은 당시 이 여사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학생을 수소문했고 간신히 이 여사의 동창 몇 명을 찾았다. 사진을 다시 찍고, 학적부를 만들어 2년 수료증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찾은 오래된 사진 1장에서 발견된 이 여사의 모습도 이대를 다녔다는 증거가 됐다. 장 전 총장은 "그것이 학적 증명이다. 법적으로 증명하게 됐다"며 "여사님이 이화여대 다닌 것을 인정받게 됐다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라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 여사는 1958년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를 맡아 모교를 다시 찾았다.

이 여사는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1940년대 당시 미국 유학길에도 올랐다. 평전에 따르면 이 여사는 동생들에게 공부 기회를 양보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맞서면서 학업을 이어간, 당시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일도 겪었다.
이 여사의 동력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강력한 후원 때문이었다. 알려진 대로 이 여사는 대통령 영부인에 앞서 1세대 여성인권운동가로 큰 족적을 남겼다.

장 전 총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 '이 여사가 나보다 더 단단하다'고 이야기했다"며 "이 여사는 생전 미투 운동과 관련해서도, '위축될 수 있으나, 더 당당하게 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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