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앓고 있다더니 거동 불편없이 걸음 당당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였다. 39년이 지났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1995년 '왜 나만 갖고 그래'라던 황당한 반응은 2019년 "아 이거 왜이래"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바뀌어 있었다.
5·18 광주 학살 최고책임자인 전두환씨가 11일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에 왔다. 5·18민주화운동 발생 후 광주 법정에 선 건 39년 만에 처음이다.
전씨는 이날 오후 12시34분쯤 검은색 에쿠스를 타고 광주 동구 광주지법 쪽문에 도착했다.
검은색 정장에 연노란 넥타이를 맨 전씨는 승용차에서 내려 주위의 부축 없이 걸어나왔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건강이 안좋다고 했으나 거동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기자들이 전씨에게 몰리자 힐끔 쳐다보던 전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명령 부인하느냐"라는 질문에 "아, 이거 왜 이래"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자들이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 "한마디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여 질문했으나 전씨는 끝내 외면한 채 법정으로 이동했다.
법정으로 이동하면서는 주위를 힐끗힐끗 쳐다 보며 긴장한듯한 모습도 내비쳤으나 걸음걸이는 거칠 것 없이 당당했다.
전씨가 법정에 출두하면서 '5·18'과 관련한 사죄나 반성의 모습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또 다시 광주를 우롱했다"며 허탈함과 함께 분통을 터뜨렸다.
광주시민 이종혁씨(47)는 "법원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거동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은데 알츠하이머를 핑계로 그동안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것은 광주시민들을 우롱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시민 정승현씨(42)는 "(전씨는) 광주에 사죄할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며 "광주에서 한다는 말이 고작 '왜 이래' 뿐이냐. 그의 당찬 모습을 보자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했다.
전씨의 '5·18과 광주시민에 대한 우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씨는 1995년 재판 당시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전면 부인해 공분을 샀다.
그해 12월에는 검찰이 소환하자 이른바 연희동 '골목 성명'을 통해 공권력을 농락하는 초법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검찰의 태도는 더 이상 진상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보아 검찰 소환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라며 경남 합천 자신의 고향으로 가버렸다.
"예금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는 발언은 전씨의 망언 중 가장 대표적이다. 전씨는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에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전씨는 2003년 자신의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골프를 치고 130만원짜리 양주파티를 벌이거나 부인 이씨의 생일 파티를 위해 수백만원짜리 출장뷔페를 부르기도 했다.
2003년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며 가해자인 전씨가 피해자인 광주시민을 폭동으로 조작했다.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는 투표를 마치고 한 방송에서 섬뜩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전씨는 기자들이 찍은 자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좋은가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라고 말했다.
이는 80년 5월 계엄군의 발포와 대검 등으로 광주시민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실을 떠올리면 잔인하고 섬뜩한 말이다.
전씨는 2017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공식 명칭인 '5·18민주화운동' 대신 '광주사태'로 지칭하면서 전혀 반성하지 않은 모습도 보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로 표현하고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5·18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개입한 반란이자 폭동"이라거나 당시 발생한 군에 의한 암매장을 유언비어로 치부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불법적인 민중혁명을 기도했다고 왜곡하기도 했다.
또 "5·18사태의 발단부터 종결까지의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며 5·18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가면을 쓴 사탄" "거짓말쟁이"라는 말로 모독했다.
전씨의 부인 이씨도 만만치않다. 이씨는 2017년 3월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통해 자신과 전씨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지난 1월에는 극우매체 뉴스타운과 인터뷰에서 "(남편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5년제 단임을 이뤘고 민주화 요구를 다 실천해주고 나왔다"며 "내 남편이 '민주주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는 망언을 했다.
시민들은 이날 전씨가 참회할 마지막 기회라며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전씨는 이같은 바람을 모두 외면했다. 1980년 5월 이후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전 대통령'이 아닌 '학살자 전두환'으로 역사에 남길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