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된 얼굴로 1050만원 찾으러 은행 온 남성

입력 2019.03.02 07:00수정 2019.03.26 15:14
A씨는 당황한 얼굴로 "현금이 필요해요!"
사색이 된 얼굴로 1050만원 찾으러 은행 온 남성
보이스피싱을 포착해 사기 피해를 막은 공로로 서울 종로경찰서로부터 표창장을 받은 서서울농협 사직지점 최부현 과장(왼쪽)과 이효은 대리. 2019.2.28/뉴스1 © 뉴스1 서영빈 기자
피해자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차분히 설득 피해 막아
2년 전엔 보이스피싱 일당 현금 운반책 잡아내기도

(서울=뉴스1) 서영빈 기자 = 지난 25일 오후 2시30분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한 은행에 회사원 A씨(27)가 사색이 된 얼굴로 급히 들어섰다. 지방 대도시에 살고 있는 A씨는 거주지와도 멀리 떨어진 은행에 나타나 "새 통장을 만들고 1050만원을 오로지 현금으로만 인출해야 한다"며 창구 직원을 재촉했다.

강씨를 상담하던 창구 직원 이효은 대리(37·여)는 이것이 흔치 않은 경우라 생각해 현금 사용 용도를 물었고, A씨는 "부동산에서 계약금을 현찰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고 답했다.

A씨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낀 이 대리는 A씨에게 보이스피싱 여부를 확인하는 4가지 질문이 담긴 질문지를 작성하도록 했다. A씨는 '검찰·경찰·금융감독원 직원이라는 전화를 받지는 않으셨나요?'라는 첫 번째 질문을 두고 고민하다가 '아니오'에 체크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검찰이 정말 민간인에게 전화하기도 하냐"고 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최부현 과장(45)은 강씨가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피해자임을 직감했다. 최 과장은 A씨에게 "그런 것은 거의 사기다"라고 설명하며 거래중인 부동산이 어딘지를 묻고 계약금을 안전하게 수표로 가져가기를 권했다. 그러자 A씨는 당황한 얼굴로 "현금이 필요해요!"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어딘가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직감을 확신으로 바꾼 최 과장은 곧장 A씨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A씨는 최 과장을 보자 다급하게 다른 곳으로 피하며 전화를 계속 했다. 최 과장은 112에 신고를 한 뒤, 경찰이 오기 전까지 A씨를 잡아둘 요량으로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A씨를 창구 안쪽의 사무실 테이블로 불러 커피를 타줬다. 그리고 갖가지 보이스피싱 사례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해 주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A씨는 그제야 마음을 열고 진상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자신을 '검사'라고 알린 범인이 전화해 'A씨의 개인정보가 노출됐으니 유출될 수 있는 재산을 보호해주겠다'며, 모든 재산과 대출받을 수 있는 모든 금액을 현금으로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특히 범인은 "은행 창구 직원이 가장 위험하니 은행원에게 절대 이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했다. A씨가 은행원 앞에서 긴장한 목소리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던 이유였다.

이 때문에 A씨는 카카오뱅크를 통해 대출 최고한도액인 1050만원을 대출 받은 상태였다. 서울에 며칠간 출장을 왔다가 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갑자기 통장을 새로 만들러 은행에 온 것이었다.

관할 지구대인 신문로파출소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출동했을 때에는 이미 강씨가 스스로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음을 인지하고 현금 인출을 포기한 상태였다. 다행히 금전피해 없이 상황이 종료될 수 있었다. 26일 오후 박동현 서울 종로경찰서장은 은행을 직접 찾아 최 과장과 이 대리에게 표창장을 전달했다.

최 과장과 이 대리 '콤비'는 2년 전에도 보이스피싱 일당의 현금운반책을 잡은 경험이 있다. 2017년 2월27일, 전남 나주에서 왔다는 B씨(52)가 대금 결제를 해야 한다며 1200만원을 인출하려고 했다.

이 대리가 5만원권이 없다고 하자 B씨는 "상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있는 거나 아무거나 달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이 모습에 의심을 느껴 시간을 끌던 차에, 공교롭게도 해당 계좌의 입금자 중 한 명에게서 '사기신고 및 지급정지' 요청이 들어왔다.

이 대리는 최 과장에게 능청스럽게 "과장님 '그것'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은행원들끼리 비밀리에 쓰는 보고 암호다. 최 과장이 B씨에게 신고 입금자와 아는 사이냐 묻자 B씨는 "아는 형님"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입금자는 B씨보다 한참 어린 92년생이었다.

결국 최 과장은 비밀리에 경찰에 신고를 하고, 출동 시간을 벌기 위해 B씨를 사무실로 데려와 커피를 대접했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 B씨는 보이스피싱 일당의 현금 운반책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 과장과 이 대리는 해당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종로서에서 감사장을 받았다.

사실 고객을 경찰에 신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잘못 짚었을 경우, 고객이 노발대발하며 "무슨 고객을 의심하냐", "은행 서비스가 왜 이러냐"며 본사에 민원을 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고객이 민원 취하서에 사인을 해줄 때까지 해당 직원이 직접 찾아가서 사과해야 한다.

그만큼 예리한 '촉'이 필요한 일을 이들 콤비가 두 번이나 해내면서, 고객의 소중한 재산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보이스피싱 조직을 추적하기 위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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