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서울 강동구의 김철수씨(60대·가명)는 지난해 채팅 애플리케이션에서 알게 된 여성에게 2000만원을 송금하려 했다. 여성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한 항공료와 체류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송금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 은행을 순찰하던 경찰이 이상한 행동을 발견해 피해를 막았다. 실제 발생한 로맨스스캠 사건이다.
"어떻게 한 번도 안 만난 사람에게 그 큰돈을 보내지?" 뉴스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대부분은 같은 생각을 한다. "바보나 당하는 거지, 나는 저런 사기 안 당한다." 그런데 금융사기 피해자들도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안 당한다?"…국민 2명 중 1명은 노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금융사기에 노출돼 있다.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이 2024년 서울·수도권·6대 광역시 거주자 2573명을 조사한 결과 이전 2년 동안 금융사기에 노출된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49.9%였다. 실제 금전 피해를 경험한 비율도 13.3%에 달했다.
국민 2명 중 1명은 금융사기 접근을 받았고 10명 중 1명 이상은 실제 돈을 잃었다는 의미다.
리딩방을 포함한 불법 유사투자자문 피해 신고도 빠르게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관련 신고 건수는 2021년 2487건에서 2022년 3614건으로 증가했다.
금융사기가 더 이상 일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 속 위험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속기 쉬운 사람'보다 '돈 있는 사람'
최근 금융사기 범죄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피해자의 연령대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비중은 60대가 24.8%로 가장 높았다. 20대 이하(24.7%)보다 높았고 50대는 20.5%, 70대 이상은 6.4%였다. 50대 이상 비중만 합쳐도 51.7%에 달한다.
2021년만 해도 60대 비중은 15.4%였다. 4년 만에 24.8%까지 상승했다. 70대 이상 비중 역시 같은 기간 3.6%에서 6.4%로 늘었다.
예전에는 사회 경험이 부족하거나 대출이 필요한 청년층이 주요 표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퇴직금과 예금, 부동산 자산을 보유한 중장년층과 은퇴자가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퇴직금이 통장에 들어오고 개인형퇴직연금(IRP), 예금, 주택 매각 대금까지 손에 쥐게 되면서 범죄 조직 입장에서는 훨씬 매력적인 대상이 된 것이다.
경찰청이 최근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한 60대 이상 고령층 피해가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경찰청에 따르면 2025년 1·4분기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액 3116억원 가운데 50대 이상 피해 비중은 53%였다. 또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0년 이후 누적 피해구제 신청 건수에서도 50대 이상이 전체의 약 70%를 차지했다.
한 번 당하면 수천만원
50대 이상 피해가 늘면서 피해 규모도 커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다중피해사기 피해액은 2021년 7794억원에서 2024년 1조6870억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1조312억원에 달했다.
경찰청은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의 건당 평균 피해액이 7438만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단순한 생활비 수준이 아니다. 퇴직금이나 노후자금이 한 번에 사라질 수 있는 규모다.
문제는 피해가 발생한 이후다.
직장인은 손실을 입어도 다시 벌어 만회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은퇴자는 다르다. 퇴직금과 노후자금은 단순한 금융자산이 아니라 앞으로 20~30년을 버텨야 할 생활비다. 다시 벌어 메우기 어렵다는 점에서 젊은층의 실수와는 성격이 다르다.
실제 하나금융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투자사기 피해자의 44.6%는 피해금을 전혀 회수하지 못했다.
은퇴자가 흔들리는 이유, '돈'
은퇴 이후에는 자산 구조 자체가 달라진다.
직장에 다닐 때는 월급이 정기적으로 들어온다.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소득으로 만회할 수 있다.
반면 은퇴 후에는 퇴직금과 예금, 연금자산에 의존해야 한다. 문제는 노후에 필요한 돈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연구원 2024년 국민노후보장패널조사에 따르면 50세 이상이 생각하는 부부 기준 최소 노후생활비는 월 216만원이다. 반면 부부가 함께 받는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은 월 120만원 수준에 그친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의료비 부담도 늘어난다. 기대수명은 83세를 넘어섰다. 60세 전후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2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은퇴자들이 '예금만으로 괜찮을까', '지금 가진 돈으로 앞으로 20~30년을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유다.
사기 조직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원금 보장, 확정 수익, 월 3% 수익, 은행보다 높은 금리 같은 문구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상적인 금융상품에서는 보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노후 불안이 커질수록 그런 말은 의심보다 기대를 먼저 불러온다.
사기는 생각보다 천천히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를 보며 '왜 그런 사기에 속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실제 금융사기는 생각보다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처음에는 투자 정보를 제공하거나 무료 리딩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일부는 실제 수익을 경험하기도 한다. 신뢰가 쌓이면 더 큰 수익을 약속하고 결국 목돈 투자를 유도한다.
하나금융연구소는 최근 투자사기가 유튜브와 텔레그램, SNS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지인 소개나 대면 중심이던 사기가 비대면 플랫폼 기반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도 범죄의 표적
최근에는 인간관계를 악용한 금융사기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로맨스스캠이다. 메신저나 SNS에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뒤 투자나 송금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로맨스스캠 피해액은 지난해 675억원에서 올해 136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은퇴 이후 인간관계가 줄어들고 사회적 고립이 심해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60세 이상 사회적 고립도는 40.7%로 전 연령층 가운데 가장 높다. 로맨스스캠이 늘어나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실제 로맨스스캠은 돈 이야기를 하기 전에 관계 형성부터 시작한다. 친구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투자 조언자가 된다. 이후 투자나 송금을 권유하는 방식이다. 강동구 김씨 사례 역시 같은 구조였다.
왜 신고를 못 할까
금융사기 피해는 다른 범죄와 다른 특징이 있다. 상당수 피해자가 신고를 주저한다.
돈을 잃은 충격도 크지만 '내가 속았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가정을 책임져 온 사람일수록 자존심의 상처가 크다. 자녀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창피함보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피해 사실을 인지했다면 은행에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경찰과 금융감독원에 즉시 신고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금을 되찾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금융당국이 실제 피해 규모가 공식 통계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융사기가 사회 문제로 커지면서 정부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현재 금융당국과 국회는 보이스피싱 피해가 발생했을 때 금융회사가 먼저 피해를 배상하는 무과실 배상책임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하나금융연구소는 보상 한도를 5000만원으로 설정할 경우 피해자의 85.2%가 전액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다만 투자사기나 로맨스스캠처럼 피해자가 직접 송금한 경우에는 적용이 쉽지 않다는 한계도 있다.
이미 있는 안전장치, 알고 계셨나요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권도 보이스피싱과 투자사기 피해를 줄이기 위한 안전장치를 확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연이체 서비스다. 송금 직후 일정 시간 동안 돈이 실제 상대 계좌로 넘어가지 않도록 해 사기임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이체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입금계좌 지정 서비스도 있다. 가족이나 자주 거래하는 계좌를 미리 등록해 두고, 등록되지 않은 계좌에는 고액 송금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고령자가 고액 이체나 대출을 신청할 경우 가족에게 알림을 보내는 서비스나 해외 접속을 원천 차단하는 보안 기능도 확대되는 추세다.
노후 준비의 마지막 단계
은퇴 준비라고 하면 사람들은 연금과 투자, 절세를 떠올린다.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산을 늘리는 것만큼 지키는 것도 중요해지고 있다.
기대수명이 83세를 넘어선 상황에서 노후자금은 단순한 금융자산이 아니라 앞으로 20~30년을 버텨야 할 생활비이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원금 보장, 고수익 확정, 비공개 투자 정보, '이번이 마지막 기회' 같은 표현이 등장할 경우 일단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노후의 가장 큰 위험은 수익률이 낮은 것이 아니다. 평생 모은 자산을 한 번의 판단 실수로 잃는 것이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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