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들의 7번째 제사상 차리는 엄마의 눈물나는 사연

2023.06.29 08:05  
지난 21일 오후, 서초구의 자택에서 아들의 제사상을 차리던 엄마 명희가 눈물을 보이고 있다. 2023.6.21/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명희의 집에 아들의 유골을 담았었던 납골함과 가족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다.2023.6.21/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지난 2014년 명희가 병무청에 제출한 아들의 병사용 진단서. '재발성 우울증'이라근 증상명이 적혀 있다. 2023.6.21/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지난 2018년 12월 국가보훈처는 최준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하며 "관리기관 내 신상관리 미흡과 '재발성 우울증' 악화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자해행위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판단"된다고 적시했다.(출처: 최준 사건에 대한 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 심의 내용 중)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91나길 2-3에서 진행된 사회복무요원 최준의 추모제에서 엄마 명희가 소리굿을 주관한 사회적협동조합 '살판'의 소리꾼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다. 2023.6.22/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서울 서초구, 명희가 운영하는 카페 메뉴판에 쓰여 있는 문구. 명희는 아들이 죽고 난 뒤 자신의 심경을 담아 이 문구를 새겼다고 했다. 2023.6.27/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박상휘 박혜연 기자 = 서울 서초구의 주택, 최명희(58·여)는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에 늦은 밥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아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구워 집안엔 연기가 가득 차올랐다. 아들을 위해 차린 밥상에는 스테이크에 더해 피자, 치킨, 잡채, 과일이 잔뜩 올랐다. 모두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이었지만 명희와 마주한 자리에 아들은 없었다.

영정 사진 속 아들은 활짝 웃는 모습으로 엄마가 자신을 위해 차린 밥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떠나간 뒤로 명희는 매년 홀로 아들의 제사상을 차렸다. 예법에 맞건 맞지 않던 아들이 좋아했던 음식이 생각나면 해마다 음식을 찾아 올렸다. 올해는 초콜릿 과자도 식탁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그 전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어요. 그런데 있을 때 잘해줬어야지… 나중이 어딨어… 죽어서 이렇게 잘해주면 뭐 해요." 아들을 떠나보내고 지내온 7년의 세월에 이제는 조금은 덤덤해졌다면서도 명희는 끝내 옷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적막해진 아들의 방에서는 엄마의 흐느낌과 제사상에 함께 올린 맥주에서 거품이 사그라지는 소리만 남았다. 아들이 엄마와 즐겨 마시던 호가든 맥주였다.

◇막을 수 있었던 죽음

명희의 아들 최준은 7년 전인 2016년 6월2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물한 살 생일이 지나고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서초구의 한 주민센터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던 최준은 사망 당일 한 민원인으로부터 창구를 잘못 알려줬다는 이유만으로 폭언을 들었다. 주변에 함께 일하던 공무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 않았다. 민원인이 센터를 떠난 뒤 분을 참지 못한 최준은 근무지를 뛰쳐나가 한남대교로 향했고, 그것이 최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09년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최준은 이후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2014년 군 입대를 앞둔 첫 신체검사에서 '현역대상' 판정을 받고 이듬해 4월 훈련소에 입영했다. 질환 때문에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없을 게 당연했다. 최준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재검 대상'으로 분류돼 귀가했다.

병역은 면제되지 못했다. 최준은 재검에서 '4급'으로 분류돼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됐고 2015년 9월 센터에 배치됐다. 그에게 배정된 업무는 '팩스 민원 보조'였지만 실제로는 민원인과 계속해 대면해야 하는 일이었다. 최준은 구청에 제출한 신상명세서를 통해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신분증 확인, 민원서류 발급 등의 업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최준이 선임으로부터 받았던 '주요업무 매뉴얼(지침서)'에는 민원인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출입국 기록, 토지대장, 거소증명 등의 문서를 대신 발급받는 등의 업무 절차가 적혀 있었다. 특히 이 매뉴얼에는 공무원들의 내부행정망인 '새올' 시스템에 로그인해 일부 민원 처리를 하는 방법도 적혀 있었다. 사회복무요원이 단독으로 개인정보가 담긴 이런 민원을 처리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과 전자정부법에 위반될 수 있다.

권한에 맞는 업무인지를 떠나서 사람을 대면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질환을 가졌던 최준에게 민원업무는 고통이었다. 그는 사망하기 2개월 전인 2016년 4월14일에도 민원업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근무지를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최준은 한남대교 방향으로 향했으나 뒤따라간 공무원과 경찰이 제지해 귀가했다.

돌아온 최준은 '자살 생각은 없었다'고 했지만 주변 직원에게 자살 시도로 보일 만큼 불안한 상태였다. 이 사건 직후 그가 서초구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사와 상담한 대화를 보면 "제일 힘든 건 민원인 상대하고 그러는 거죠. 저는 사람들 만나는 걸 힘들어하고 싫어하는데 자꾸 민원인 계속 만나야 하고…"라는 내용이 담겼다.

한차례 소동이 있고 최준은 잠시 민원담당 업무에서 배제됐다. 명희는 이때 다시 아들의 건강이 조금 회복됨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사망 당일 다른 사회복무요원이 반차로 자리를 비우자 센터는 최준에게 민원업무를 대신하라고 했다. 그리고 사고가 터졌다.

명희는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비극을 부추긴 시스템에 분노했다. 실제 최준의 죽음은 2018년 12월 보훈처에서 업무연관성이 있는 '순직'으로 인정받았다. 보훈처는 '관리기관 내 신상관리 미흡'과 '재발성 우울증 악화'가 최준이 사망에 이르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고 판단했다.

◇아직도 한강을 보면…

지난 22일 사회복무요원 노동조합은 최준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서울 용산구 서빙고로91나길 2-3)에서 그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열었다. 최준을 위해 소리굿을 연 사회적협동조합 '살판'의 소리꾼은 구성진 목소리로 최준의 영혼을 부르고 달랬다.

이날 명희는 아들이 사망한지 꼭 7년 만에 처음으로 한강을 찾았다. 7년 전 '혹시나'하는 마음에 아들을 찾아 한강변 수풀을 뒤졌던 그날 이후 TV에서라도 한강이 나오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애써 고개를 돌렸다.

최준을 추모하기 위해 간이 책상으로 만들어 놓은 제단에는 영정사진과 함께 신발 한켤레가 올랐다. 최준이 생전 사두었다가 한번도 신어보지 못한 채 두고 간 나이키 신발이었다. 명희는 아들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가던 날 다 떨어져 빗물이 새던 신발을 신고 나간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려 신발을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넋이로다 넋이로다 최준 요원의 넋이로다. 극락으로 가자서라." 소리꾼은 소리 높여 최준의 명복을 빌었고 주변엔 그가 피워 놓은 쑥향 냄새가 가득했다. 소리굿의 북소리, 장구 소리가 커지자 명희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어 떨구며 통곡했다.

추모제를 위해 명희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명희는 "내 아들이 몸이 쾌유될 때 까지 충분한 병가를 주었다면 우울증이 있었다 해도 아이가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적은 급여로 제게 밥을 사주던 아들이 미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아들이 사놓고 신지 못한 새 운동화가 아들 없는 방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 최명희씨가 아들의 추모제를 위해 아들에게 썼던 편지(클릭하면 링크와 연결됩니다.)

◇"이런 죽음 또 없어야"

지난 27일 서초구의 한 카페, 명희는 아들의 추모제가 끝나고 나서 정신이 줄곧 없었지만 오픈 시간에 맞춰 가게 문을 열었다. 이전에도 서초구에서 카페를 하던 명희는 아들이 떠나고 난 뒤 약 1년간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금 자리에 다시 카페를 열었다.

명희의 카페 메뉴판에는 하단에는 "나는 왜 '이처럼'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고 있나?"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명희가 아들을 잃고 새로 카페를 열며 새겨놓은 문구다.

메뉴판 위 문장처럼 명희는 불행한 일만 끊임없는 반복되는 것 같다고 했다. 2011년 '우면산 산사태' 때 삶의 기반이었던 가게가 흙에 파묻히면서 순식간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한 경험을 했다.

명희는 카페 운영 사정도 좋지 않다고 했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19로 제대로 장사를 하지도 못했다. 아들을 보내고 여러 불행이 겹치면서 명희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우울증약과 수면제도 함께 복용하고 있다

명희는 "당장이라도 아들을 따라가고 싶다"면서도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어떻게든 '연명'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 다시는 아들과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말하며 아들의 죽음을 기록한 문서들을 매만졌다.

대로변이 아닌 명희의 카페엔 점심시간이 지나야 서서히 손님들이 차기 시작했다. 손님이 오갈 때마다 카페 정문에 붙은 'Happiness'(행복)이라는 문구가 함께 흔들렸다.

※최준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2016년 모두 19명의 사회복무요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이후 사회복무요원 자살자는 2017년 16명, 2018년 9명, 2019년 10명 2020년 15명, 2021년 11명, 2022년 11명으로 매년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최준의 사례처럼 복무 중의 고충으로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던 사회복무요원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기획취재팀(박상휘 팀장, 박동해·박혜연 기자)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