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이비슬 기자 = "1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몸이 좋지 않은 홀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에게 남은 남자 가족은 저밖에 없다는 생각에…."
지난 10일 오전 서울남부지법 형사 9단독 김윤희 판사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피고인 배모씨(23)는 "나쁜 마음으로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며 휴대전화에 준비해온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앳된 얼굴의 배씨는 허위 뇌전증을 진단받는 수법을 이용해 병역을 회피한 혐의로 이날 함께 재판을 받은 피고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검찰은 배씨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이날 재판에는 병역면탈을 시도한 피고인들과 범행을 도운 친구, 피고인의 어머니, 구속 상태인 병역 브로커 김모씨(38)를 포함해 21명이 출석했다. 검찰은 추후 법원 심리가 필요한 4명을 제외하고 18명에게 각각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다수 피고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재판인 만큼 법정 내부는 재판 시작 전부터 변호인, 피고인 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30석 가까운 법정 내부 좌석이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로 가득 찼다.
재판 시작 전 피고인 출석여부와 인적사항 확인에만 15분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전 프로게이머 코치, 골프강사, 학생, 회사원, 사업가, 자영업자까지 피고인 직업도 다양했다.
이날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 모두 혐의를 인정하고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검찰 구형 직전 변론에서 피고인 육모씨(27)는 "범행 직전 첫째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돼 순간 잘못된 판단을 했다"며 "군대에 가면 아내와 자식의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범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재판에는 아들의 병역회피를 도운 어머니들도 피고인으로 출석했다. 징역 1년을 구형받은 이모씨(52)는 "부모로서 역할을 하지 못해 깊이 반성한다"며 "아들이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올바른 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고 호소했다.
또 다른 병역면탈자의 어머니인 김모씨(69)는 "잘못된 모성애로 인해 큰 잘못을 저질렀다"며 "성실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신 분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평생 반성하며 살겠다"며 울먹였다.
검찰은 김씨가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거액의 대가를 지급한 점을 고려해 징역 2년을 구형했다. 김씨는 재판이 끝난 뒤에도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흐느껴 울었다.
재판에서 실제 뇌전증을 앓았다고 주장한 피고인은 한 명뿐이었다. 피고인 이모씨(26)의 변호인은 "어릴 때부터 앓은 뇌전증이 범행의 계기가 됐다"며 "범행을 인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피고인 중에는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 출신의 유명 팀 코치인 이모씨(27)도 포함됐다. 징역 1년이 구형된 이씨는 "입영 연기만 하려다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검찰은 이날 직장 동료 오모씨(26)의 발작 증세를 목격한 것처럼 거짓말한 송모씨(26)에게도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오씨에게는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송씨는 "함께 일하던 오씨가 군대에 가서 회사를 비우면 회사가 망할 것 같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며 "앞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허위 뇌전증 수법을 소개한 병역브로커 김모씨는 하늘색 수의를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법정에 들어섰다. 김씨는 검찰 공소 내용에 "모두 인정한다"고 밝혔다. 김씨의 변호인이 불출석해 김씨에 대한 구형은 연기됐다.
김씨는 인터넷 병역상담카페를 개설하고 2020년 5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병역면탈 의뢰인을 상대로 가짜 뇌전증 진단을 받도록 알선한 혐의를 받는다.
김씨가 '뇌전증 5급 미판정 시 보수 전액 환불'을 조건으로 병역면탈자들에게서 받아 챙긴 돈은 수 억원에 달했다. 1건당 계약금을 300만원에서 1억1000만원까지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범행이 중대하고 계획적으로 장기간 저지른 점을 고려하면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면서도 "병역 의무자들이 자백하는 점, 범행 수법이나 브로커를 타인에게 소개한 정황이 없는 점, 동종전력이 없는 점을 고려했다"고 구형 사유를 밝혔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