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가상계좌가 사기나 도박에 사용되는 것을 몰랐습니다."
6개월간 가상계좌 4만7443개를 만들어 인터넷 도박사이트 운영자 등에게 판매한 이모씨(57)는 법정에서 이렇게 발뺌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전자결제대행(PG) 업체의 회장인 이씨가 실무자 김모씨(35)와 꾸민 범행은 2021년 대전 조폭 A씨와 거래하면서 시작됐다.
폭력조직 한일파 조직원 A씨는 온라인 쇼핑몰을 허위로 만들어 이씨의 전자결제대행업체에 등록하고 계좌생성 권한을 받았다.
이씨는 A씨의 요청을 받아 가맹점에 다수의 가상계좌를 부여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을 구축했다.
A씨는 조직원들을 시켜 가상계좌를 만들고 계좌 입금액 중 일부를 이씨와 김씨에게 수수료로 지급했다.
온라인 업체가 결제대행사에서 계좌 개설 권한을 받으면 가상계좌를 무한대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가상계좌를 통하면 돈이 여러 번 이동하기 때문에 추적이 어렵다는 점도 이들의 구미를 당겼다.
피해자들이 송금한 돈은 차례로 가상계좌→PG사 명의 계좌→온라인 판매업체 명의 계좌를 거쳤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자신의 정보가 범죄에 이용된 사실조차 몰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이들은 2021년 4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가상계좌 4만7443개를 만들어 보이스피싱 수금 계좌, 불법 도박사이트 입출금 계좌로 활용하려는 범죄자들에게 개당 150만원에서 200만원에 판매했다.
이들 가상계좌는 사기나 도박 범행을 용이하게 하거나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됐는데 실제 입금된 금액만 1조원에 달했다.
그동안 자금 추적을 피하는데 이용하던 대포통장을 가상계좌가 대신한 셈이다.
이씨 등은 재판에서 "A씨와 공모하지 않았으며 가상계좌가 사기나 도박에 사용되는 걸 몰랐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이씨의 회사는 가상계좌 사업 매출이 없다가 A씨와 계약한 뒤 매출이 발생했다"며 "이씨는 매월 매출액을 보고받고 가상계좌가 급증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씨에 대해서도 "2021년 11월부터 이씨 업체에서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급여를 A씨에게서 받았다"며 "이용된 가상계좌에 제공된 가입자 정보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수사기관을 속이기도 했다"고 판시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12단독 신성철 판사는 사기방조및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씨와 김씨에게 각각 징역 3년을 선고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