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30명가량의 생명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졌던 ‘영웅’은 주한 미군인 것으로 밝혀졌다.
충청북도 청주시에 사는 20대 A씨는 3일 자신의 이태원 참사 탈출 이야기가 미담 사례로 크게 보도된 후 그를 구해준 은인을 찾았다고 알려왔다.
A씨는 "3명의 미군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힌 이태원 참사 상황과 구조 활동 등이 내가 경험한 일들과 똑같이 일치한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달 29일 오후 6시경 핼러윈을 즐기기 위해 친구들 5명과 이태원을 찾았다. 그는 참사가 발생하기 직전 해밀톤호텔 옆 골목으로 진입했다가 양쪽에서 밀려오는 인파 사이에 끼어 갇혔다. 결국 중심을 잃고 넘어졌고 4명의 다른 남성들에게 깔려 15분간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빠져나가길 포기할 때쯤 건장한 체격의 흑인 남성이 A씨 팔과 겨드랑이를 잡더니 밭에서 무를 뽑듯 번쩍 들어 올려 구조했다.
키 182㎝·몸무게 96㎏인 A씨를 들어 올려 골목 옆 술집으로 옮긴 이 흑인 남성은 다른 외국인 2명과 함께 계속 사람들을 구출했다. A씨는 “이들 외국인 3명은 무려 30명가량을 구조했으며 119구급대원들이 출동한 후 조용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A씨의 경험담이 전해지고 새로운 목격담이 더해지면서 그날 그 의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하는 미군 자밀 테일러(40), 제롬 오거스타(34), 데인 비타드(32)다.
이들 3명은 주말 비번을 맞아 핼러윈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해밀톤호텔 옆 좁은 골목을 걸었고 양쪽으로 밀려드는 인파에 떠밀려야 했다. 위기감을 느낀 셋은 벽을 타고 간신히 주변 난간으로 피신했지만, 곧바로 벌어진 광경은 참혹했다.
테일러는 “우리가 군중에서 빠져나온 뒤 잠시 후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서로의 위로 쓰러지기 시작했다”며 “모두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상황은 더 악화됐다. 비명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켜버렸다”고 그 순간을 회상했다.
세 사람은 즉각 구조에 나섰다. ‘살려달라’ 소리치는 사람들을 인파 속에서 꺼내 근처 상가와 클럽으로 대피시켰다. 도착한 구조대원들이 심폐소생술(CPR)을 할 수 있도록 희생자들을 넓고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이들은 밤새 골목 가장자리에 머물며 구조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오거스타는 “물러서라고 소리쳤지만 너무 늦었다”며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비타드도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꽉 끼여 있었기 때문에 구조대원들도 쉽게 그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며 “우리는 밤새도록 깔린 사람들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장을 벗어날 즈음 떠올리면서는 “우리가 떠날 때 모든 곳에 시신이 있었다”고 했다.
A씨는 "우리가 갇혔던 곳은 골목의 중간 위치여서 구급대가 제일 늦게 접근한 곳이고 구조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군들이 그곳에서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에 나선 덕에 인명피해가 줄었다. 포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도움을 준 그들을 꼭 만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