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女의원, 의미심장 고백 "남편이 정치하면 이혼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2020.09.03 06:40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8.21/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8.21/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1일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8.21/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최고위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향자·노웅래·김종민 최고위원, 이 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염태영·신동근 최고위원. 2020.8.31/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김윤경 기자 = 뭐든 뚫고 나가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열여섯 살 이후로. 갖고 있는 자산은 한정돼 있었고 새로운 자원은 노력으로 획득해 나갔어야 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릴 때도 적잖았다. 하지만 목표를 만들어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은 힘이 되었고 그는 울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고졸로 입사해 임원이 되었어도 '철저히' 비주류였지만 삼성이란 대기업에서의 30년은 자신을 견고히 '물건'(인재)으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아무런 '연'(緣)도 '끈'도 없던 정치판으로 나왔다. 여전히 도전하는 인생이다. 맨땅에.

지난달 29일 치러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당선된 양향자 국회의원(초선⋅광주서구을) 얘기다.

인터뷰는 전당대회 이전인 지난달 21일 진행됐다. 지난 전대에서 정치 입문 반 년도 안 돼 최고위원이 돼 주목됐고 이번에도 또 최고위원이 됐으니(지난달 29일 전대에선 득표 결과 5위를 차지했다) 야심 많은 그가 느꼈을 성취감은 클 것이다. 물론 그만큼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의지 또한.

양향자 의원은 민주당을 경제 정당으로 이끌고 문재인 대통령을 '경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한국판 뉴딜 정책을 뒷받침하는 '당정청(3)+민간(1) 협의체' 구성부터 하자 제안할 것이라고. 민간 산업과 실물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정청만 협의해선 나올 결실이 없다는 지적. 그리고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해 과학기술부총리 부활을 원한다고 했다.

다음은 양향자 의원과의 일문일답.

-양향자라는 인물은 도전의 아이콘 같다.

▶ 삶은 (도전해서 얻는)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성장해서 남들은 다 할 수 없는 (임원이라는)'갑'의 위치까지도 갔던 게 아닌가.

▶ 임원이 됐다고 갑의 위치가 됐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오너 외엔 그냥 다 노동자이지. 나는 한 번도 '직'(職)에 대해 생각하고 집착했던 적이 없다. 그냥 내가 가치있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내가 저 직에 가야겠다' '한 번 더, 1년 계약이 더 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없다. 그때그때 내 쓰임에 최선을 다 하면 회사가 필요로 할 것이라 생각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내 쓰임이 있으면 쓰임을 당하는 것이고 필요없는 상황이 되면 내가 먼저 떠날 것이다.

◇직장이든 정치판이든 쓰임이 있으면 남고 필요없다면 떠난다

-낙선했을 때(2016년 총선) 직이 없어졌는데 최고위원에 도전해 직을 얻지 않았는가.

▶ 뭔가를 하기 위해 쟁취해야 하는 직은 있는 거다. 회사에서도 불의를 해결하기 위해선 힘이 없으면 안 되잖는가. 그게 동력이다. 그리고 나는 늘 미래지향적이었다. 필요한 직이 있으면 치열하게(해서 획득하고), 경쟁이 필요하다면 경쟁을 하고 그랬다.

-삼성에서 '물건'(인재)란 평가로 힘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참고: 물건이란 칭호는 상고를 졸업하고 연구원 보조로 입사한 삼성전자(당시 삼성반도체)에서 얻었다. "획득했다"는 단어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단순업무만 계속하던 그는 일본어를 주경야독 익히기 시작했다. 복사해서 연구원들에게 나눠주기만 하던 반도체 기술 관련 자료가 모두 일본어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나눠주기만 해도 될 걸 그는 일본어로 된 문장 밑에 깨알 같은 한국어 해석을 달아 복사해서 나눠줬다. 처음엔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 듯 했던 연구원들은 차츰 그의 해석이 담긴 자료에 익숙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늘상 불리던 "미스 양!" 대신 드디어 "양향자씨!" "물건"으로 불리는 날이 온다)

▶ 물건이 아닌 날이 더 많았다. 100번 중에 한 번이나 물건일까 말까 한 날들이었다. 하다하다 잘 안 되어 벼랑 끝에 몰려있을 때 "(사투리로)나는 진짜 안 되는 갑다" 생각할 때 들은 말이 물건이란 말이었다. 그 말이 그래서 사무쳤고 기억에 남아 지금껏 나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계에서도 물건이 되려고 한다? 평가받고자 일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정치란 영역에 왔으니 여기서도 10년을 할지, 15년을 할지 모르겠으나 '가치있게 살다 거룩하게 죽자'는 나의 신념에 따라가려고 하고 있다.

-자신을 야심가라고 생각하는가.

▶ 남들이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웃음). 그 야심이 선의의 야심이었으면 좋겠다. 제일 잘하고 싶다. 정치에 나왔으니까 또 여기서. 정치라는 건 이타적인 삶인데 그 삶을 제대로 살아야 되는 거라 생각한다. 그동안 자신만 생각하는 삶이었다면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거니까.

- 정치권에서 '쓰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어떤 계기였나?

▶ 설득 당한 거다. 그 쓰임은 내가 잘 판단하기가 어려운데 민주당이 가장 어려웠을 때인 5년 전, 문재인 당시 당 대표가 제안했다. 그때 내가 삼성에서 임원 3년차 들어가던 때였다. 아직 (임원으로서) 꽃도 안 피워봤는데 저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거다. 원래 친분은 없었다.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쓰레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약간 혐오감이 있었다. 사실 혐오감보다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기술 개발로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가치 속에서 살고 있었다. 국내총생산(GDP) 늘어나는 일을 하는 게 더 좋은데 정치권과 언론은 도대체 하나도 이런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영역으로 저를 영입하겠다고 했으니까 처음엔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 생각했고 정치는 정말로 '1도' 생각을 안 해봤다.

◇정치 '1도' 생각 안해봤는데…도와달라는데 거절 못해서

그리고 마침 또 그때가 내가 입사한지 30주년 되는 해였다. 2015년 11월25일이 입사 30주년 되는 날이었다. 1985년 11월25일에 입사를 했으니까. 그래서 저는 나머지 30년을 내 후배들이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나가면 보람이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 60년이 되면 내가 78세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한 번도 정치권에 가서 내가 뭘 해보겠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 때, 정말 힘들다고 손을 내밀 때 그건 잡아줄 수밖에 없더라. 내가 좀 오지랖도 넓다. 어릴 때 동네 애들은 내가 다 업어줬던 것 같다. 동네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내가 가서 뭔가 달려가서 뭘 좀 해서 도와줘야 하고, 달래주고...



-이른바 'K장녀'이신 것 같다.

▶ 그런 말이 있나? (K장녀란 Korea(한국)의 앞 글자와 장녀란 단어를 합친 것으로 책임감과 습관화된 양보 등을 미덕으로 치는 가부장제를 사회를 견디며 희생하며 살아온 여성들이 스스로를 다소 자조적으로 칭할 때 쓰인다) 나는 그저 지금도 '호남의 딸 영남의 맏며느리' 이렇게 얘기를 한다. 일을 다 관장하고 정리하면서도 갑의 위치가 아니라 늘 을의 위치에서 서포트(지원)를 해 주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드렸다는 말도 "내가 알아서 할게" 였다고.

▶ 아버지가 오래 편찮으셨다.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손을 잡으며 "내가 오래 못 살 것 같다"는 한마디를 하셨다. 나는 대답을 딱 한마디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그 안에 다 포함돼 있지 않느냐. 내가 동생들, 어머니 다 잘 보살필게, 나도 열심히 공부할게, 그 말이었다. 근데 그게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도 '내가 알아서 해내야 하는 사람'이란 운명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정치권으로 올 때도 그런 심정이었나.

▶ 개인적인 결정은 할 수 없었다. 가족이 있으니까. 남편은 "정치할 거면 이혼하자"고 그랬다. 그 정도로 남편도 정치권을 혐오스러워했다. 그러나 (문 당시 당대표가 직접 남편을 만나) 설득을 잘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묘한 운명 같은 걸 느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되면 나는 '내가 희생해야 할 순간이 왔구나' '운명적인 시간이 왔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은데 그때도 그랬다.그래서 내가 삼성에 남아 30년 더 일을 하는게 더 가치있는 일인가, 정치권에서 이렇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내가 돕는 게 내 쓰임인가 아무에게도 얘기도 하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선택했다.

-이번에 최고위원에 또 도전한 이유는.

▶ 도전했다기보단 불려나왔다. 항상 위기에 불려나오는 사람이라 하지 않는가. 처음엔 거부했다. "했는데 왜 또 하냐"는 주변 인식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려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또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저는 소명의식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웃음).

-최고위원이 되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가.

▶ 경제 살리기에 힘을 쏟을 것이다. 어떤 정권에서도 경제를 얘기하지 않은 정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등으로 초유의 위기이지 않은가. 이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산업으로의 전환은 아주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한국판 뉴딜 정책을 정말 속도감있고 담대하게 펼쳐가야만 하는데 당정청만 협의해가지고선 해답이 나오기 어렵다. 실물경제에 있는 민간 산업계와 당정청(3) + 민간 기술산업계(1) 협의체를 구축해야 한다. 예산도 컨트롤타워가 있어서 일관되게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과학기술부총리도 부활하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미래산업에 대한 인재교육을 위해선 과기부총리가 필수적이다.

한국판 뉴딜이 제시한 'DNA' 즉, 디지털(Digital)과 네트워크(Network), 인공지능(AI) 산업을 이해하고 그 산업의 실제 경험과 역량을 가진 사람은 나라고 본다. 지도부는 전투력보다 압도적인 정책능력과 실력으로 끌고 가는 유능함을 국민들께 보여야 한다.

지도부가 구성되면 당장 산업현장을 방문하고 기업들의 신뢰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당의 반기업 이미지도 씻어내야 한다(양향자 의원은 지난달 31일 새 지도부 최고위원 회의에서도 '현장 최고위'를 정례화하자고 제안했다).

◇여당 오롯이 신뢰받지 못하는 원인은 기대 크면 실망도 크기 때문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데.

▶ 여당이 국민께 신뢰를 오롯이 받지 못하고 있는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거대여당일수록 국민들이 거는 기대와 믿음이 큰데 반대로 실망감도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책임있는 정당이라면 건설적 비판은 잘 수용하고 합리적 소통도 이뤄내야 한다. 그리고 정당 재설계가 필요하다. 강령뿐 아니라 문화, 정당이 일하는 방법까지도 DNA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그래서 민주당을 초격차 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당의 젠더 감수성 부족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보는가.

▶ 이 부분도 개조가 필요하다. 여전히 젠더 감수성이 완전히 내재화하지 않았고 피상적으로만 바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뼛속까지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 필요하다. 여성최고위원 나 밖에 없지 않느냐. 사명감을 갖고 하겠다.

-당 지도부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되면 의원으로서 발의하는 법안은 줄어들지 않을까 우려된다.

▶ 그렇지 않다.
빠른 시일 내에 일단 AI 관련 법안을 내놓으려 한다. AI 산업 육성을 하려 해도 관련 법안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기업 출신의 다른 의원들도 뜻을 같이 하고 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