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달아준 붉은 카네이션 대신 아들이 흘린 붉은 피가 선명한 피켓을 들고서 어머니 이나금씨(60·여)는 다시 또 거리로 나선다.
■너무나 명백한데 왜 처벌하지 않았을까
경희대학교 3학년이던 지난 2016년 서울 신사역 인근 한 성형외과에서 안면윤곽수술을 받다 중태에 빠져 끝내 숨진 권대희씨가 바로 그녀의 아들이다. 수술 중 흘린 피만 45kg 성인여성 혈액 전체에 해당하는 3500ml다. 그토록 무섭던 수술실CCTV를 500번이나 돌려보며 어머니는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수술을 하겠다고 약속한 집도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수술실로 나가버리고, 사전에 고지되지 않은 20대 신입의사가 권씨를 이어받았다. 그마저도 다른 수술실로 나가고 간호조무사 홀로 권씨를 지혈한 시간만 35분여에 달한다. 역시 다른 수술실을 바삐 오간 마취과 의사는 권씨가 흘린 피가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회복실로 올라가지 못한 권씨를 두고서 의료진은 모두 퇴근해버렸다. 당시 이 병원에서 권씨와 동시에 이뤄진 수술은 권씨 포함 모두 3건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의료진에 대해 사기와 상해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핵심쟁점으로 꼽힌 의료법 위반 혐의조차 불기소 처분했다. 여러 전문 감정기관의 답변과 경찰의 기소의견 송치를 모두 뒤집은 결정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검사는 문제 병원이 권씨 사망 뒤 내건 ‘14년 무사고’ 광고조차 처벌하지 않았다. 이미 권씨 사망 후 한 차례 내걸어 처벌받은 전례가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본지 2월 8일. ‘[단독] 수술 환자 사망에도 '무사고' 광고 처벌 無... 짙어지는 검찰 '봐주기' 의혹’ 참조>
이씨는 수사검사인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당시 부장 강지성·현 부장 이창수) 소속 성재호 검사와 병원 측 변호인이 각별히 가까운 사이라며 검찰에 수차례 탄원서를 넣었지만 검찰은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았다. 성 검사와 병원 측 변호인 윤모씨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사법연수원을 함께 나온 동기동창으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들이 죽고 4년이 흐른 2020년, 이씨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오기까진 이러한 일들이 자리했다. 이제 이씨는 시민들의 깨어있는 힘에 기대려 한다. 법원이 검찰의 불기소 결정의 당부를 살피는 마지막 절차, 즉 재정신청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시민들의 동의를 받아 탄원서를 넣겠다는 것이다. 목표치는 5000명이다.
지난 4년 동안 유족의 이름으로 검찰과 법원에 수차례 탄원서를 넣었고 올해 3월에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린 이씨다. 그녀가 거리로 나온 건 이 모두가 좌절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마음이며, 하늘에서 죽은 아들이 그녀를 돕는다는 믿음이다.
지난 몇 차례의 형사공판이 철저히 언론으로부터 소외된 가운데 이씨는 직접 시민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씨와 그를 지지하는 소수의 시민들이 제작한 피켓엔 ‘수술실CCTV 명백한 살인증거’, ‘5년째 형사 1심 재판’, ‘3500cc 피 흘리는 애를 내팽개치고 또 다른 환자 수술하러 나간 의사 그냥 두고만 보시렵니까?’, ‘처참한 공장식 유령수술대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가짜 성형광고로 도배된 나라’, ‘나는 자식이 죽어가는 수술실CCTV 500번 이상 봤다’ 등의 문구가 담겼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지금 이씨 곁에서 함께 1인 시위를 준비하는 몇몇 시민들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다. 지난 몇 차례 보도와 유튜브 방송을 통해 모인 이들은 이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가까이 여기며 공론화를 돕기 시작했다.
권씨 모교인 경희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도협씨(23)도 그중 하나다. 김씨는 “매일 눈물에 젖어 살아가시는 유가족 어머님께서 부패한 세력과 투쟁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니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며 “어머니께서 현재 이곳저곳 아픈 곳이 많으셔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큰데, 대학생들이 어머님과 함께 나서 시위에 참여한다면 기성세대와 언론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싶어 돕게 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씨는 경희대학교 학내 언론인 ‘대학주보’가 권대희 사건을 조명해 대학생들이 무분별한 성형수술에 경각심을 갖도록 보도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본지 4월 18일. ‘'학생들도 나섰다'... 경희대 '대학주보' 故권대희 사건 집중보도’ 참조>
한편 모두가 1선에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선에서 앞에 나선 이들에게 힘을 싣는 이도 존재한다. 자신이 있을 곳에서 제 자리를 지탱함으로써 가족을 지키는 권씨 아버지와 권씨의 형도 그런 이들이다.
대희씨의 형 권태훈씨(34)는 “동생의 억울한 죽음 후 우리는 가해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수술실CCTV 설치를 국회, 보건복지부, 검찰, 국민신문고 등 권한 있는 국가기관에 수없이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답을 듣지 못했다”며 “어머니께서 거리로 나가는 걸 말리고도 싶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한 명의 생각이라도 더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참았다”고 털어놨다.
지난 2018년 겨울, 수술실CCTV 법제화(일명 권대희법)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100일 간 1인 시위에 나섰던 이씨는 17개월여 만인 이달 11일부터 1인 시위를 재개한다. 첫날인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위를 시작해, 광화문과 서초동 법원과 검찰청 앞, 대학가 등을 돌며 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이씨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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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