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돈 벌어서 자식만 키우면 되는 줄 알았지…나이 드니까 우울한 삶이더라고"
79세 배원섭(가명)씨는 매일 탑골공원에 온다. 아무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아내는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났고 둘 있는 자식은 따로 산다. 연락은 가끔 한다.
누군가는 '오죽하면 혼자 살겠냐'며 혀를 차겠지만, 배씨에겐 나름 할 말이 있다.
배씨는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던 시절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5년간 근무했다. 가족과 떨어져야 했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릴 형편이 안 됐다. 그는 사우디에서 번 돈으로 두 자식을 키워 대학을 보냈다.
이후 국내에서 30년 넘게 부동산을 운영하다 은퇴했다. 30년 동안 두 자식은 결혼했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으며 배씨는 혼자가 됐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게 당연 시 여겨지던 시대에 살던 배씨는 자식과 친해질 겨를도 없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가 황혼기에 들어설 무렵 가족은 핵가족화됐고, 어느새 자식에게 손 벌리기도 어려운 처지가 돼버렸다.
배씨는 "애들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고 내 할 일 다 하고 나니 노후대책이 없더라"라며 "우리 때야 부모 모시고 살았지 요즘 세상이 어디 그런가. 애들은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쁘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열심히 살았는데도 요즘은 내가 헛살았나 싶다"며 "돈은 없고 자식이랑 멀어지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다. 우울한 삶이다"라고 토로했다.
즐거운 일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매달 25일이 제일 좋다"며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25일은 배씨가 25만원씩 노령기초연금을 받는 날이라고.
■ 상실감에 물든 고령층 5명 중 1명은 "우울해"
평균 수명이 늘고 노인의 설 자리가 줄어들면서 노인 우울증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인이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어른의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경제·사회적 능력을 상실해 갈 곳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노인의 21.6%가 우울증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한 노인의 6.7%는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고, 이들 중 13.2%는 자살을 시도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자살을 생각한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이 27.7%로 1위로 집계됐다. 건강 문제가 27.6%, 부부·자녀·친구와의 갈등과 단절이 18.6%로 뒤를 이었다.
실제로 종로3가 인근 노인들에게 '언제 우울함을 느끼냐'고 물었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와 "외로울 때"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구체적으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삶의 가치가 없다' '명절에 갈 곳이 없다' 등 대답이 있었다.
이들 중 아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는 이모(77)씨는 "집에 있기 눈치 보여 아침부터 떠돌아 다니다 저녁에나 들어가면 얼마나 비참한지 아나"라며 "며느리한테 받은 용돈 5천원으로 2~3일 아껴 소주 한 병 사먹는 처지다. 오래 살아서 뭐하나 싶다"고 털어놨다.
마포에 살고 있다는 강모(81)씨는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자식한테는 눈치 보여서 손도 못 벌린다"라며 "고혈압약에 당뇨약 먹고 몸은 안 아픈 데가 없는데 늙어서 낙이라고 할 게 있겠나. 박탈감만 커진다"고 하소연했다.
■ 모두 잃은 듯한 박탈감 우울증 원인…늦기 전에 병원 방문해야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최근 5년간 28.6% 증가했다. 특히 연령별로는 ▲60대 17% ▲70대 15.6 ▲80대 7.8%로 노인 우울증의 비중이 두드러졌다.
우울증은 자살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만큼 관리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전문가에 따르면 가벼운 우울증은 적절한 운동과 외출, 햇빛을 보는 것으로 증상이 완화될 수 있다.
노성원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고령층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건강이 나빠지고 주변 사람들마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며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이 우울증에 큰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일상적인 슬픔이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 등 비관적인 생각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우울증의 징조가 될 수 있다"며 "병을 키우기 전에 병원을 찾아 치료받는 게 좋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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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affle@fnnews.com 윤홍집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