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로 한국에 대한 무역수출규제를 강화한데 이어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도 배제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전쟁의 아픔과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본인들은 아베 정권을 향해 경고등을 울린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공유하고 서로 간 우정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지금, 뉴스1은 이들의 평화를 향한 흔들림 없는 움직임을 조명하고 관계 개선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부산=뉴스1) 조아현 기자 = 지난 3일 오전 11시쯤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愛媛県) 마쓰야마시(松山市) 나카니시우치(中西内) 지역에서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양일씨(82)는 츠가댐에 강제 연행된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냈다.
이씨의 아버지는 1914년 1월5일 충남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30번지에서 태어났다.
1942년 일본 군인 몇 명이 집안에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어서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이씨 아버지의 나이는 28세 정도였다.
이씨의 아버지는 일본 군인이 왜 마을에 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트럭에 실려 일본 시코쿠 고치현(高知県)으로 연행됐다.
이씨는 "(아버지를 포함한)청년 60명 정도가 트럭에 선 채로 연행됐고, 항구를 통해 일본에 도착한 뒤 다시 몇 팀 정도로 나눠졌다"며 "(이런 방식으로)약 100명(의 조선인)이 고치현 타이쇼(大正) 지역의 산 속으로 끌려오게 됐다"면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회상했다.
이씨는 다섯 살 무렵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아버지를 찾아 고치현의 타이쇼 지역으로 오게됐다.
이씨는 어머니와 타이쇼에 있는 한 식당에서 생활했지만 둘 다 일본어가 서툴러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씨는 또래 아이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말과 함께 돌에 맞은 기억도 떠올렸다.
터널공사 현장에서 화약 폭파작업이 이뤄지고 나면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은 철로 된 작은 망치같은 도구 하나를 손에 들고 돌을 걷어내고 파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씨는 "터널을 폭파하고 뚫는 공사작업 과정에서 사상자가 굉장히 많이 발생했다고 들었다"며 "아버지는 15년 전쯤 돌아가셨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때의 공포가 계속 떠올라 이를 잊기 위해 술을 자주 마셨다"고 증언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무덤이라고는 시신 위에 흙을 덮고 돌 하나 얹은 것이 전부였다. 표식마저 없는 무연고 무덤도 많았다고 한다.
이씨의 아버지는 처참한 강제징용 현장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가난한 생활을 버티고 버텨 1950년이 되어서야 가족들이 터전을 마련해 함께 살 수 있었다.
이씨는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강제 연행된 조선인 가운데 가족들을 함께 데려온 것은 강제징용 노동자를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결코 잊지 않도록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며 "절대로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행복을 여러분이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