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16일부터 시행됐다. 특정인이 지위나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이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막기 위한 법이다. 이같은 근로기준법 개정전부터 회사문화는 많이 변했다. 그러나 여전히 '괴롭힘 무풍지대'(無風地帶)는 존재한다. 대학 연구실이다. 무소불위 권력을 지닌 '절대 갑'인 교수들이 있는 곳이다. 학생들은 '을'이다. 연구실 문화는 언제쯤 변할 수 있을까. 정부는 연간 20조원에 달하는 국가 연구개발(R&D) 개혁을 위해 온갖 해외 제도를 도입했지만 정작 '연구문화' 조성에는 뒷짐 지고 있다. '30대 민간인'이 나섰다. 유일혁 김박사넷 대표는 연구문화를 바꿔보기 위해 지난해 1월 교수평가사이트 '김박사넷'의 문을 열었다. 벌써 운영 1년 6개월째. 김 대표를 만나 국내 연구실 문화의 실정,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관련기사 선택 아직/
# 직장을 다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국내 박사과정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근데 입학한지 얼마 안 돼 지도교수가 자신의 막내아들을 봐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세 살 난 딸아이가 있는데 애를 키워봤으니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 거 같다는 게 이유였어요.
# 지도교수가 장인상을 당했는데 우리 연구실 학생들 모두 3일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셋째 날 안 온 일부 학생들에게는 교수가 사회생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며 뭐라 하더군요. 대한민국에서는 대학원생이 교수 장인어른 초상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교수평가 사이트 '김박사넷'의 익명게시판 '김 아무개의 랩'에 올라온 최신 글들이다. 대한민국 이공계 대학원 연구실의 시대상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 졸업 권한을 쥐고 있는 지도교수는 연구실 내 철저한 '갑'이고 학생들은 '을'이다. 연구에 전념은커녕 인간적인 삶부터 찾고 싶다는 게 학생들의 외침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실 내부 사정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연구실 내부 불합리한 내용을 바깥으로 발설해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수가 제보자를 색출해 그 학생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으며 신고 후 교수가 지도교수 자격을 박탈당한다면 지도교수를 잃은 학생들은 또다시 졸업장을 따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특히 '좁은 학계'의 특성상 한번 찍히면 끝이라 상대적으로 직장인들에 비해 '내부고발'이 힘든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이렇게 은밀(?)하게 이뤄지는 교수들의 악행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지도교수 평가 사이트 '김박사넷'이 지난 2018년 1월 문을 열고 약 1년 6개월간 운영되고 있다.
유일혁 김박사넷 대표(34)는 최근 <뉴스1>과 만나 국내 대학 연구실 문화에 대해 "국내 이공계 대학원 연구실 문화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서 "제도가 교수한테 학생을 마치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줘 놓고 양심에 따라 노예로 사용할지 말지를 고르라는 격"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연구실은 계급사회로, 그곳에서 학생들은 '노예' 신분을 가진다. 서울대 재료공학부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 변리사 일을 한 유 대표는 누구보다 이공계 학생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한 유 대표는 김박사넷의 문을 열었다.
유 대표는 "사실 제도적으로 이러한 연구실 문화를 바꿔야 하지만 십수 년간 바뀌지 않은 게 현실"이라면서 "제도적 차원이 아닌 자연스럽게 연구실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학생들이 '갑'이 있는 교수 연구실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유 대표의 논리는 이렇다. 학생들에게는 도움을 주고, 일명 '나쁜 교수'들에게는 피해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생들이 나쁜 교수 연구실에 가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다. 나쁜 교수가 학생을 받으면 언젠간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연구실에서 일을 시키며 졸업을 늦추고 괴롭힘을 쏟아 내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그러나 나쁜 교수들이 학생을 받지 못하면 결국 연구실은 인력 부족으로 질 좋은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 도태될 것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지난 2018년 1월 문을 연 김박사넷은 나쁜교수를 가려낼 수 있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이트에 로그인을 하면 운영진이 입력하는 정량적인 데이터도 볼 수 있다. 최근 5년간 교수의 SCI(Science Citation Index) 논문 수, 피인용 횟수, 석사·박사 졸업생 수, 박사 입학 후 졸업까지 필요한 평균 학기 수 등이다. 동일계열 타 연구실과 비교한 지표도 있어 한눈에 연구실의 수준을 보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매달 10만명 이상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한 김박사넷의 묘미는 '한줄평'이다. 한줄평은 졸업자나 재직 중인 학생이 교수나 연구실 분위기에 대해 정성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로그인을 하지 않아도 익명으로 교수들을 인품, 연구실분위기, 논문지도력, 실질 인건비, 강의전달력 등 5가지 지표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간혹 5가지 요소 모두 상위 점수를 기록하는 '가득 메워진 오각형' 교수들도 찾아볼 수 있다.
송준호 서울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또 한줄 평에는 '파도 파도 미담만…', '모든 교수가 이분 같았으면 이 사이트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 '암흑 같은 대학원에 한줄기 빛과 소금 같은 존재', '대학원생들의 유토피아를 찾고있다면, 고개를 들어 갓준호를 보라' 등의 한줄평이 가득하다.
정덕균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도 '완벽한 교수님', '학문적으로도 인품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최고일 듯', '교수님의 실력이 대단하셔서 배워가는 것이 많고, 연구실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좋습니다', '좋은 학자이자 교육자십니다', '서울대학교 최고의 연구실'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교수들은 '블라인드'로 다 가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한줄평을 지워달라는 교수들의 요청 때문이다. 운영진은 삭제요청이 있으면 블라인드 처리해 지워주고 있다. 결국 블라인드 처리 글이 많으면 많을수록 '감추고 싶은 게 많은 교수'라는 오명이 붙는다.
유 대표는 "처음엔 교수들이 직접 한줄평을 지워달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준 편"이라면서 "자정적인 노력을 통해 바꾸려고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한줄평 조작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다. 유 대표는 "조작될 경우 자체적으로 걸러지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 한 교수의 경우 실제로 평이 좋지 않았는데 갑자기 좋은 평이 올라온 적이 있다"며 "그 좋은 평 아래에는 '아래 댓글 조작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면서 전쟁터가 펼쳐지더라"라면서 웃으며 대답했다.
<②편("갑질교수님이 달라졌어요"…연구실 문화 변해야 '두뇌유출' 막는다)으로 이어집니다 >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