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1) 서영빈 기자 = "내가 3년만 어렸어도 공무원시험 안 봤다."
소위 SKY로 불리는 명문대 인문계열을 졸업한 정모씨(31)는 2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정씨는 스스로 열정과 호기심을 갖고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는 "이과대에 다니다가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학교를 다시 들어갔다"며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언어학·인문·사회를 공부했고, 인디밴드에서 악기연주를 하며 클럽 무대에 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열정에 맡겨 살다가 서른 살이 되니 내가 직업으로 삼고 싶은 일이 뭔지 알게 됐다. 하지만 서른 나이에 준비해 이 업계에서 신입으로 채용되기는 어렵다고 (친구들이) 뜯어말리더라"며 "허탈하지만 늦은 나이에 큰 모험을 할 수 없어 결국 나이 제한이 없는 공무원 시험을 선택했다"고 털어놨다.
정씨는 "내가 표준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멀리 둘러서 온 만큼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갖고 있다"며 "그런 게 쓰일 데가 분명 있을 텐데 지금은 공무원밖에 할 게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연령에 따른 고용상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있지만 이력서에 연령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민간기업에서는 사실상 '나이 상한선'이 작동하고 있다는 게 취업준비생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학부 시절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뒤 현재는 미국에서 4년째 유학 중인 김모씨(30·여)는 "한국에서는 어느 나이까지 취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고 친구들도 그것에 쫓겨 움직인다"며 "그래서 학점이나 취업 준비 외에 예술이나 여행처럼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미국 친구들은 졸업하고 나서도 몇 년 동안 해외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배우고 사람을 사귀고 온다"며 "그래도 나이 때문에 취업 걱정을 하지는 않더라. 그런 분위기가 부러워서 미국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시대에 안 맞는 '연령 상한제'…'공시족' 양산
우리나라 기업들이 일정한 '입직 연령'을 두고 공채제도를 운용해왔던 건 과거 일본의 직장문화 영향이 컸다.
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사원을 채용해 빠른 시간에 기업 문화에 적응시키기 위해서는 선후배 사이 규율이 필요했다. 연공서열 문화가 뚜렷하다 보니 지시를 내려야 하는 상사보다 나이가 많은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소위 '족보가 꼬인다'고 여겼다.
채용 시장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나이 상한선'은 다양한 관점·아이디어가 중시되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예전에 나이 어린 대졸자를 주로 뽑으려고 했던 건 백지상태로 데려와야 조직에 동화시키기 좋았기 때문"이라며 "군대라는 경험에 유교 문화도 더해져서 사수·부사수 개념의 서열 문화가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마트한 노동, 좀 더 창의적인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문화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인간형을 육성하는 발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자기 경험과 자기 판단이 자율적으로 뿜어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모색해야 혁신적인 풍토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에서는 유독 처음 만나면 학번과 나이를 물어보고 한 살이라도 어리면 형, 동생 관계를 만들어서 반말을 한다"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떤 능력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나이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아이디어와 스킬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게 핵심"이라며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화와 언어습관부터 조직체계까지 위계적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지금의 20~30대 청년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맹목적인 입시 위주 교육체계 속에서 진로를 충분히 고민해볼 시간이 없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때문에 뒤늦게 진로 고민으로 방황하다가 취업 상한선을 지나쳐버리거나 쫓기듯 아무 곳에나 입사했다가 금방 퇴사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지금 20~30대는) 중고등학교 때 입시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학생들이 취업과 관련해서 자기 일과 보람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인생의 진로를 지도해주는 과정이 중고등학교 때도 별로 없고 대학교 때도 없다"며 "선진국에 비해서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진로 교육의 부재는 앞서 인터뷰한 정 씨의 사례처럼 뒤늦게 방황하다가 진로를 발견해도 막상 취업 상한선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로 이어진다. 입사 나이 제한이 없는 공공기관에 청년들이 몰려드는 데는 이 같은 이유도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건 민간 부문 고용상황이나 근무 여건이 너무 터프하다는 게 주된 이유"라면서도 "나이 상한선에 걸려 민간에서 받아주지 않으니 공기관으로 가게 되는 것도 그 트렌드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인터뷰에서 "입사 준비하는데 2년 정도 걸린다고 할 때 28살부터 시작해도 이미 늦다. 2년 안에 취업에 실패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고 그 시간은 다 허송세월이 되는 것"이라며 "그런 이유로 애초에 공무원 시험으로 시작하는 친구들도 많다. 2년 안에 실패해도 그 다음이 있으니까"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