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들 잃은 죄책감에..' 암 선고 받고도 아프단 말도 못한 父

"잠깐 바닷가 다녀온다고 했거든요.."

2019.05.24 07:01  
1987년 8월 해운대 바닷가에서 실종된 홍봉수(현재 만 35세)씨의 어머니 오승민씨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5.1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1987년 8월 해운대 바닷가에서 실종된 홍봉수(현재 만 35세)씨의 어머니 오승민씨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5.1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1987년 8월 해운대 바닷가에서 실종된 홍봉수(현재 만 35세)씨의 어머니 오승민씨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5.1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1987년 8월 해운대 바닷가에서 실종된 홍봉수(현재 만 35세)씨의 어머니 오승민씨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5.1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32년전 해운대서 잃은 아들…납치범 전화에 되레 희망
"봉숭아물 손가락, 황금색 수영복, 하늘색 운동화" 생생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암 선고를 받고도 아프다고 말을 안 해요. 자기 때문에 애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말을 못 한 거예요."

지난 1987년 여름, 부산 해운대 바닷가로 놀러 간 아들 홍봉수씨(당시 4세·현재 만 35세)를 여읜 아버지는 11년을 아들만 그리다 세상을 떠났다. 시름이 쌓여 위암이 됐지만, 아들을 잃은 죄책감에 배를 찌르는 고통도 속으로 삼켰다고 한다.

남편은 떠났지만 기다림은 이어졌다. 남편의 빈자리를 짊어진 엄마 오승민씨(65·여)는 그렇게 21년 동안 홀로 봉수를 찾아다녔다. 32년이 흘렀지만, 오씨는 열 손가락에 봉숭아 물이 빨갛게 든 아들이 어제처럼 또렷하다고 말했다.

<뉴스1>은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은 오씨를 만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국 입양시설과 전문기관, 국회를 닳도록 헤맸다는 그는 곱게 모았던 봉수의 사진을 한장 한장 꺼내며 가슴에 묻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바닷가 다녀온다고 했는데"…벌써 32년

"잠깐 바닷가 다녀온다고 했거든요. 그게 30년이 넘었네요"

지난 1987년 8월23일, 부산에서 살던 오씨는 4살배기 봉수의 손을 잡고 해운대 큰집으로 향했다. 음식점 장사를 했던 큰집에 일손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오후 2시, 봉수는 오씨의 치맛자락을 잡아끌었다. 사촌 형·누나들과 바닷가에 놀러 가고 싶다고 했다.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피서객을 상대하던 오씨는 본체만체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게 봉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후 4시가 돼서야 늦은 점심을 준비하던 오씨에게 사형(형수의 남동생)이 다급하게 달려와 "봉수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부산 휘파리(음식점 호객꾼)를 죄다 풀고 해양경찰까지 나서서 해운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봉수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씨는 "다음날 새벽 4시쯤 다시 파출소를 찾아갔더니 실종 신고도 안 돼 있었다"고 말했다. 실종자 수색 골든타임인 12시간이 넘었는데도 접수조차 안 된 셈이었다. 오씨는 "그때가 포도철이라 포도 한 박스를 주니 그제야 신고 접수가 됐다"고 했다. 촌지 없이는 펜대가 굴러가지 않던 시대였다.

32년이 흘렀지만 오씨는 아들의 손끝 하나까지 선명하게 기억했다. 오씨는 "손가락 10개가 동글동글하고 봉숭아 물이 들어 있었다"며 "당시 유행했던 황금색 수영복에 하늘색 운동화를 신고 바다로 갔다"고 회상하며 끝내 눈시울을 적셨다.

◇"애는 우리가 키우겠다" 납치범의 전화…오히려 희망됐다

"일주일 뒤에 전화가 왔어요. '애는 우리가 키울 테니 찾지 말라'고요. 그리고 10년 뒤에 또 한 번 '계속 찾으면 이민을 가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어느 부모가 포기하나요?"

오씨가 30년 넘게 아들을 찾아 헤매게 한 것은 봉수가 실종되고 일주일 뒤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낯선 이는 대뜸 '우리가 애를 키울 테니 찾지 말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오씨는 "한 50대쯤 돼 보이는 여자 목소리였다"고 기억하면서 "당시에는 나이 든 불임부부가 예쁘장한 남자아이를 데려와 아들로 삼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야속하게도 납치범의 전화가 오씨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 됐다. 그는 "그래도 없는 집안에서 애를 데려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위안으로 삼으면서도 "혹시 애를 버리지 않을까 매일같이 일시보호소와 입양기관을 찾아다녔다"고 그간의 세월을 곱씹었다.

마지막으로 걸려온 전화는 10년 전이었다. 그사이 남편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에 이어 오씨도 갑상선에 병을 얻었지만 죄스러운 마음에 수술도 고사하고 약으로 버텼다.

한해 한해 아들의 나이를 세어가며 전국 학교까지 찾아다녔던 오씨가 마지막으로 신문 광고를 내자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선 "계속 찾으면 이민을 가겠다"는 협박이 흘러나왔다. 발신자 위치 추적이나 통화녹음은 꿈도 꾸지 못한 시절이었다.

오씨는 "찾지 말란다고 포기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혹시 외국으로 갔을까 해외에서도 아들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목회를 보는 오씨의 오빠는 매주 1~2회씩 TV방송을 내보내며 봉수의 흔적을 찾고 있다. 혹시 군대라도 갔을까 싶어 국내 군부대에도 봉수를 찾는 광고가 붙었다.

"오죽 못났어도 좋으니 다시 만났으면…그저 고맙다고 하고 싶어"

오씨는 다시 아들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왈칵 눈물을 쏟으며 "그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15년 전 봉수씨를 찾을 수 있던 기회가 한 번 있었지만 허망하게 사라졌다. 오씨는 "2004년 실종아동법이 통과된 기념으로 경찰, 법무부, 보건복지부가 장기실종아동 납치범 자진 신고 행사를 준비했다"며 "자신 신고를 한 사람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조건이어서 큰 기대를 걸었지만, 고(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터지면서 행사가 묻혔다"고 말끝을 흐렸다.

오씨는 이듬해인 2005년 실종아동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자마자 전담기관을 찾아 유전자(DNA) 등록부터 했다. 장기실종아동이 살아있을 경우 실제 부모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전자 정보뿐이다.

오씨는 단 한순간도 아들이 살아있으리라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봉수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다 닦아놓았다"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죽 못났으면 애를 잃어버리겠나'고 하시죠. 괜찮습니다.
우리 아이만 찾으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이에요. 기관이고 국회고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다시 우리가 다시 만나길 원할 뿐입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