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중국인 디아스포라(해외 이주)는 역사 이래 계속돼 왔다. 중국은 왕조의 교체 주기가 평균 300년으로 매우 짧았다. 따라서 왕조 교체기의 전란과 기근 등을 피해 중국인들은 일찍이 해외 이주에 나섰다. 지구상에 ‘차이나 타운’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화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임에도 말이다.
화교에 대한 편견과 법률적 제약으로 인해 한국 화교의 숫자가 2만 명 아래로 내려가 한국에서 화교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중화권의 대표적 영자지인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3일 온라인 톱으로 보도했다.
화교인 마졘셴씨는 성공한 화교다. 그는 1989년 서울 근교에서 뼈해장국을 개발했다. 이후 뼈해장국은 대박이 나 이제는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메뉴가 됐다. 뼈해장국의 레시피는 그의 어머니가 한국인 부인에게 전수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마씨같은 화교 성공 스토리는 접하기 힘들다. 1970년 화교의 숫자는 4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2018년 현재 화교의 숫자는 1만8000명에 불과하다.
한국 화교협회 사무총장인 궈완위씨는 “한국 화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멸종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화교들이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이 외국인의 부동산 취득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 화교들이 한국 친구의 이름으로 부동산 등기를 했다.
뼈해장국으로 성공한 마씨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버지는 제법 땅을 모았다. 법률적 제약 때문에 등기를 한국 친구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친구의 자식들이 소유권을 주장했고, 땅의 절반을 빼앗겼다.
70년대 이 같은 법률은 다소 완화됐다. 외국인들도 공장부지의 경우, 일인당 165㎡를 소유할 수 있게 됐고, 주택용지의 경우, 661㎡를 소유할 수 있게 됐다.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이도 충분치 않았다. 중화요리 집을 내면 딱 맞을 공간에 불과했다.
이후 한국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요리 집을 차리는 것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1970년대 쌀이 부족해 분식을 장려했던 시절, 한국 정부는 중화요리 집에서 볶음밥을 파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로 간섭을 심하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중화요리집이 문을 닫았고, 이들은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나게 됐다.
외국인에 대한 토지 소유 제한은 1999년까지 지속됐다. 당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절실했다. 한국은 1999년에 이르러서야 외국인 부동산 소유를 자유화했다.
그래도 제약은 계속됐다. 화교들은 안정적인 직장과 안정적인 수입원을 갖고 있어도 주택담보 대출을 받을 수 없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장기 저리의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그러나 화교들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같은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이같은 이유로 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한국 화교들의 멸종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화교학교다.
서울에 있는 화교학교는 지금 학생수가 400명에 불과하다. 1970년만 해도 2900명이었다.
한국 화교협회 사무총장인 궈씨는 “화교는 중국도 대만도 한국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SCMP는 전했다.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